앤트로픽, 종이책 수백만권 확보·스캔…AI 학습 데이터 경쟁
AI 등장 이전 출간된 책에 주목…폐기·공정경쟁 논란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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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최첨단 인공지능(AI)을 개발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뜻밖에도 낡은 종이책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정보보다 AI가 등장하기 전에 사람이 직접 쓴 글이 더 가치 있는 학습 데이터로 주목받으면서 세계 각국의 헌책방까지 AI 데이터 확보 경쟁의 무대로 떠오른 것이다.
미국에서는 AI 기업의 종이책 대량 구매와 스캔, 폐기 관행을 둘러싼 논란이 저작권 문제를 넘어 시장 경쟁과 지식 자원의 보존 문제로 확산하고 있다.
◇ 수백만권 사서 스캔 후 폐기…AI 기업의 '종이책 확보전'
AI 기업의 종이책 대량 확보 실태는 작가들이 앤트로픽을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 집단소송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났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월에 소송 과정에서 공개된 미국 법원 문서를 토대로 앤트로픽의 '프로젝트 파나마'를 보도했다.
문서에 따르면 앤트로픽은 2024년 초 이 프로젝트를 본격화했는데 구글의 도서 디지털화 사업 '구글 북스' 출범에 관여했던 톰 터비를 영입해 이 프로젝트를 맡겼으며 수만권 단위로 책을 사들여 수백만 권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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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화 방식은 '파괴식 스캔'으로, 절단기로 책등을 잘라 낱장으로 만든 뒤 고속 스캐너로 읽어 들이고 남은 종이는 재활용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앤트로픽만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 매체 404미디어는 아마존도 책을 대량 구매해 AI 학습용으로 스캔한 뒤 폐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에서도 최근 헌책방에서 철학, 역사, 의학 등 전문 분야 책이 대량으로 팔리는 현상이 목격되면서 AI 모델 개발사가 학습용으로 사들여 스캔한 뒤 폐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이와 관련해 니혼TV는 일본의 한 대형 도서 유통업체 자회사가 미국으로 책을 50t 이상 수출했다며 이는 약 10만권에 달한다고 전했다.
일본서적출판협회는 도서 유통업체인 일본출판판매가 미국 앤트로픽에 서적을 대량으로 판매했을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질의서를 보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고책들이 대거 팔려나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이제는 대량 서적 거래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 인터넷에 없는 '인간의 글' 찾아…헌책방까지 번진 데이터 경쟁
AI 기업이 물류 및 스캔 비용을 감수하며 종이책을 찾는 이유는 소송 문서를 보면 나와 있다.
앤트로픽 경영진은 인터넷의 저품질 문장이 아니라 '잘 쓴 글'을 AI 챗봇 '클로드'에 학습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보다 앞선 시기에 나온 책을 찾은 것이다.
특히 챗GPT가 공개된 2022년 이전에 출간된 책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AI가 생성한 문장이 섞이지 않은 '순전히 사람이 쓴 글'이기 때문이다.
이미 절판돼 전자책으로도 유통되지 않는 책들은 중고책으로라도 실물을 확보해 스캔하지 않으면 텍스트를 얻을 방법이 없다는 점도 고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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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 각국 중고 서점의 이례적인 대량 주문이 주목받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국과 아일랜드 전역의 중고 서점에 신원을 알 수 없는 구매자들의 대량 주문이 몰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통 대량의 중고책 주문은 스포츠나 자동차처럼 주제별로 이뤄지지만 이번 주문들은 공통점이 없었다.
◇ 저작권 넘어 공정경쟁 논란…AI 시대 지식 자원 보존도 과제
그렇다면 책을 스캔해 AI 학습에 쓰면 법적인 문제는 어떻게 될까.
앤트로픽 소송을 맡았던 미국 법원의 판사는 지난해 6월 합법적으로 구매한 책을 스캔해 AI 학습에 쓴 행위는 미국 저작권법상 공정이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다만 앤트로픽이 프로젝트 파나마에 앞서 해적판 도서 사이트에서 책 수백만 권을 내려받은 부분은 침해 소지가 있다고 봤다. 이후 양측은 최대 15억 달러(약 2조원) 규모의 보상안 등을 포함한 화해 절차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종이책 구매 및 스캔이 공정이용으로 판단되자 논쟁의 초점은 도서 파기와 시장 경쟁 문제로 옮겨갔다.
미국 디맨드 프로그레스 교육기금이 주도한 18개 단체는 지난 8월 미 연방거래위원회(FTC)에 서한을 보내 AI 기업들이 책을 대량으로 사들여 스캔한 뒤 파기하는 관행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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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단체는 자본력이 큰 AI 기업이 책을 대량 확보한 뒤 파기하면 경쟁사의 비용을 높이고 신생 기업의 핵심 원천 자료 접근을 막을 수 있으며, 파기된 책 가운데 일부는 마지막 남은 사본일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앤트로픽은 자사의 어떤 데이터 확보 프로그램도 희귀본이나 고서를 사들여 파기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국 시사지 리즌도 출판사가 책을 다시 찍을 수 있고 다른 학습 데이터도 풍부하다고 반박했다. AI 기업이 구매력을 이용해 책값을 끌어올렸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AI 학습용 저작물 이용 문제가 현안이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는 지난 3월 관계 부처에 법과 제도 개선 방안 마련을 권고했다. 사전 동의를 원하는 창작자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기업이 법적 불확실성 없이 저작물을 학습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데이터 마이닝(TDM) 면책, 학습 데이터 공개 등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음악 저작권 단체 등 창작자 단체들은 어떤 형태의 면책 규정 도입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AI 기업들이 학습 데이터를 확보하려고 헌책방까지 뒤지는 현실은 우리가 이미 보유한 고유한 지식과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만의 데이터를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하느냐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president2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