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6월말 기준 국내 은행에서 잔액 10억원이 넘는 고액예금이 총 1천조원에 육박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반도체 등 주력산업 수출 호조로 기업 실적이 대폭 개선되면서 기업이 은행에 맡기는 여유 자금이 큰 폭 늘어난 영향으로 추정된다. 주요 시중은행의 수출대금 관련 거래에서도 올 하반기 외화자금 유입 급증세가 뚜렷이 관찰된다.
8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을 보면, 올해 6월 말 기준 국내 예금은행의 저축성예금(정기예금·정기적금·기업자유예금·저축예금) 중 잔액이 10억원을 초과한 계좌의 총예금은 960조1150억원으로 집계됐다. 관련 통계를 작성한 2002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작년 말보다 91조6350억원(10.6%) 증가했고, 작년 6월 말과 비교하면 138조7020억원(16.9%) 늘었다. 올해 들어 처음 900조원대를 기록하며 단숨에 1천조원 가까이 다가섰다.
잔액 10억원 이상 고액 예금 계좌 수는 작년 말 10만좌에서 올해 6월 말 10만2천좌로 늘어 역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 6월 말 전체 저축성 예금에서 10억원 이상 고액 예금이 차지하는 잔액 비중도 50.6%에 달해, 2022년 6월 말(50.6%) 이후 4년 만에 다시 절반을 넘어섰다.
예금 종류별로 보면, 10억원 초과 정기예금 잔액은 666조1620억원으로, 작년 말보다 58조9870억원(9.7%) 증가했다. 특히 법인과 개인사업자 등이 일시적인 여유자금을 맡기는 기업자유예금 잔액은 278조780억원으로, 30조4690억원(12.3%) 불었다. 작년 상반기 2.4% 감소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은 관계자는 “10억원 초과 고액 계좌는 대부분 법인 계좌로 추정한다. 올해 상반기 기업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되면서 예금 잔액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며 “고액 계좌 증가 폭이 예년보다 컸고, 잔액 기준 비중도 50%를 초과했다. 가계 예금은 잔액이 줄어든 것과 대조된다”고 말했다.
기업 여유자금 확대는 앞서 지난달 발표된 한은의 자금순환 통계에서도 확인됐다. 올해 2분기 비금융 법인기업의 순자금 운용액은 67조1천억원으로, 1분기(20조8천억원)보다 크게 늘어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9년 이후 역대 최대였다. 순자금 운용은 금융자산 운용액에서 차입 등 자금조달액을 뺀 것으로, 기업의 자금 여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기업의 금융기관 예치금 운용액도 1분기 17조8천억원에서 2분기 84조3천억원으로 늘었다. 한은은 반도체 수출 호조에 따른 기업 이익 증가를 배경으로 설명했다.
올해 들어 급속히 불어난 기업 여유자금의 출처는 주요 시중은행의 수출대금 관련 거래(유입·회수) 내역을 보면 뚜렷이 나타난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올해 1∼10월 타발송금 취급액은 총 6217억9천만달러로 집계됐다. 작년동기대비 30.1% 급증했다. 타발송금은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온 송금이다. 타발송금의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은 지난 7∼10월(48.2%)에 대폭 높아졌다. 올 하반기 들어 해외 자금 유입이 더욱 활발해진 것이다. 같은 기간 매입외환(네고) 취급액 역시 1070억1천만달러에서 1407억2천만달러로 31.5% 증가했다. 특히 올해 10월 한 달 동안의 네고 취급액은 202억4천만달러에 달해, 작년 동월대비 84.2%, 전월대비로도 47.1% 급증했다. 네고는 기업이 수출대금으로 받을 외화채권을 은행에 넘기는 거래다.
5대 은행의 기업 달러예금 잔액도 올해 10월 말 총 645억5천만달러로, 1년 전보다 197억3천만달러(44.0%) 늘었다. 기업 달러예금은 올해 6월 말 530억7천만달러에서 9월 말 699억달러로 하반기 들어 석달 새 31.7% 뛰었다.
조계완 선임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