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해운시장은 유난히 요동쳤다. 2월 말 미국과 이란 사이에 시작된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은 7개월 넘게 막혔고, 미국의 관세정책은 태평양 항로의 물동량을 흔들었다. 9월에는 가뭄으로 파나마운하의 하루 통항 척수가 다시 줄며 운임을 상승시켰다. 그사이 장금상선 그룹이 전쟁 직전 사들인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으로 큰돈을 벌고 있다는 보도와, 15년 전 역외 탈세 논란에 휩싸였던 ‘선박왕’ 권혁 시도그룹 회장이 개인 체납액 3938억원을 모두 내기로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최근 10년 국내 해운업의 역사를 돌이켜보자. 국내 1위 선사이던 한진해운은 2017년 파산했고, 현대상선(현 HMM)은 구조조정을 거쳐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가 대주주가 된 뒤 늘 인수·합병(M&A) 매물로 거론된다. 해운업이 얼마나 큰 부를 만들고 또 잃게 하는 산업인지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손자병법’ 군쟁 편에 ‘이환위리’(以患爲利)라는 말이 있다. 근심을 이로움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경기 진폭이 큰 해운업에서 이 말은 M&A의 원리가 된다. 호황기에는 누구나 배를 늘리지만, 불황에 매물을 사들여 체질을 바꾼 기업이 다음 호황의 과실을 가져간다.
불황이 만든 글로벌 재편
2010년대 중반의 장기 불황은 지금의 해운 판도를 만든 M&A의 출발점이었다. 독일 하파크로이트는 2014년 칠레 콤파냐수드아메리카나데바포레스(CSAV)의 컨테이너 부문을 인수해 이듬해 흑자로 돌아섰고, 2017년 중동 유나이티드아랍시핑컴퍼니(UASC)와 합병해 세계 5위권에 올랐다. 프랑스 시엠에이시지엠(CMA CGM)은 2016년 싱가포르 엔오엘(NOL)을, 머스크는 2017년 독일 함부르크쥐트를 인수했다. 중국은 중국원양해운(COSCO)과 차이나쉬핑을 합친 뒤 2018년 홍콩 오오시엘(OOCL)까지 사들였다.
코로나19 대유행 호황 이후에는 무게중심이 수직계열화로 옮겨갔다. 엠에스시(MSC)는 볼로레의 아프리카 물류 사업을, 머스크는 육상·항공 물류 기업들을 인수했다. 배를 늘리는 경쟁이 항만과 육상 물류까지 묶는 공급망 경쟁으로 바뀐 것이다. 국가의 셈법도 중요해졌다. 하파크로이트가 2026년 2월 약 42억달러(약 5조6500억)에 합의한 이스라엘 짐(ZIM) 인수는 이스라엘 정부가 안보 우려로 9월 말 기존 신청의 심사를 중단했다. 합병 자체는 취소되지 않았으나, 하파크로이트는 수정안을 다시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해운 M&A가 기업 간 거래를 넘어 경제 안보의 영역이 되었다.
한국의 세 가지 방식
국내에서도 불황을 기회 삼아 경쟁력을 키운 사례들이 있다.
첫째, 에스엠(SM)그룹의 부실기업 인수다. SM은 2013년 법정관리 중이던 대한해운을 인수해 장기 운송 계약 중심으로 정상화했다. 2016년에는 한진해운이 무너지자 회사 전체가 아니라 미주·아시아 노선의 영업망과 인력만 사들여 SM상선을 세웠고, 기존 인력을 유지하며 영업 노하우를 흡수했다. 인수 과정에서 국외 법인의 우발채무가 드러나자 이를 인수 대상에서 빼면서 양수가는 370억원에서 275억원으로 낮아졌다. SM상선은 몇 년간 적자를 견딘 뒤 2020년 흑자로 돌아섰다. 해운업에서는 싸게 사는 것만큼 불황을 견딜 수 있는 재무 체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둘째, 하림의 수직계열화다. 하림·제이케이엘(JKL) 컨소시엄은 2015년 법정관리 중이던 팬오션을 약 1조원에 인수했다. 식품기업이 대형 벌크 선사를 사는 데 대한 우려가 컸지만, 사료 곡물을 대량 수입하는 하림에 해운은 원가의 일부였다. 외국 선사에 내던 운임을 그룹 안으로 들인 셈이다. 팬오션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자리 잡았고, 2026년엔 에스케이(SK)해운의 VLCC 10척과 관련 사업을 약 9700억원에 인수해 유조선 분야로 영역을 넓혔다.
셋째, 장금상선의 선택과 집중이다. 1989년 한-중 항로로 출발해 아시아 역내 항로에 집중한 장금상선은 2019년 흥아해운 컨테이너 부문을 인수해 몸집을 키웠다. 유조선 사업 계열사 장금마리타임은 2025년 말부터 중고 VLCC를 대거 사들였고, 몇 달 뒤 전쟁으로 유조선 운임이 치솟으면서 큰 이익을 냈다. 시황을 읽은 선제 투자였지만 전쟁이라는 외부 변수의 덕도 컸다. 외신은 투자 규모를 약 70억달러, 운용 규모를 세계 VLCC 선대의 약 10%로 추산했다. 세계 1위 컨테이너 선사 MSC는 장금마리타임 지분 50%를 인수해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세 사례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업황이 안 좋을 때 샀고, 자기 사업과 연결되는 인수 논리가 있었다. 그리고 회사를 통째로 사기보다 필요한 사업만 골라 사거나 우발채무를 가려내 값을 조정했다. 부실까지 함께 떠안지 않으려는 설계다.
멈춰 선 큰 판
국내 대형 해운사들의 M&A는 여전히 정체돼 있다. HMM은 2024년 초 하림과의 매각 협상이 결렬된 뒤, 10조원 안팎으로 거론되는 몸값을 감당할 인수자가 마땅치 않아 민영화의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HMM의 SK해운 인수 협상은 2025년 8월 가격 차이로 결렬됐고, SK해운의 대주주인 한앤컴퍼니는 몸값을 극대화하기 위해 통매각 외에 ‘카브아웃’(분리매각)이나 선박 단위 매각 등 다양한 출구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아이엠엠프라이빗에쿼티(IMM PE)·아이엠엠(IMM)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이 인도네시아 시나르마스그룹 계열 프런티어리소스에 넘기기로 한 현대엘엔지(LNG)해운은 공정거래위원회와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심사는 통과했지만, 산업통상부의 외국인투자 안보심사가 남아 거래 종결이 늦어지고 있다. 해운업계 및 단체들은 핵심 에너지 운송 자산이 국외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국가 에너지 안보 위협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살 사람은 적고, 업황 사이클을 견딜 자본은 더 적은 시장이다.
업황 변화가 심한 해운 M&A는 불황을 견딜 재무구조와 ‘왜 이 회사를 사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먼저 갖춘 인수자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해운업에서 가장 매력적인 매물은 파도가 잔잔할 때가 아니라, 모두가 거센 폭풍을 두려워하며 서둘러 항구로 피할 때 바다에 나온다. 그때 바다로 나설 준비가 된 자만이 위기를 기회로, 근심을 이로움으로 바꿀 수 있다.
반영은 휴맥스해운항공 대표 uokiok11@gmail.com
반영은은 1992년 1월 산업은행 국제금융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2020년 M&A실장까지 주로 M&A와 사모투자펀드 업무를 담당하며 현대건설·하이닉스 등 대형 딜의 매각 자문, 금호아시아나그룹·현대그룹·동부그룹 등 대기업의 구조조정 M&A 업무를 수행했다. 2005~2008년, 2017~2020년 두 차례 산업은행 뉴욕지점장 등으로 근무하며 미국 금융시장에서 M&A 인수금융에 참여하는 등 선진 금융시장을 체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