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유홍준)이 일제강점기 항일지사 박원근(1912∼1950)이 남긴 글씨라며 전시에 내걸었던 서예 작품이 같은 이름을 지닌 친일파 인사의 글씨로 드러났다.
박물관은 지난 7월부터 상설관 1층에서 한국 음식문화사를 짚는 내용으로 마련한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10월25일까지)에 내걸었다가 전시 1달여 만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1874~1959)이 다른 이름으로 쓴 글씨일 수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철수시킨 서예 작품 ‘一飯是國恩’(일반시국은)에 대해 전문가 심층조사 결과 박중양의 글씨로 판명됐다고 7일 발표했다.
이 작품은 개인소장품으로,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의병장 영규 대사(?~1592)가 처음 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모을 때 말했다고 전해지는 ‘한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라는 뜻의 한자 문구를 큰 행서체 글씨로 써놓은 것이 특징이다. 큰 글씨 왼쪽 옆에 작은 글씨로 ‘韓人 朴源根’(한인 박원근)이라고 쓴 사람 이름도 적었다.
박물관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서예·근현대사·고문헌·보존과학 분야 전문가 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작품을 정밀 검증한 결과, 박중양이 일본에 유학하던 구한말 청년 시절 남긴 글씨로 판단된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 작품과 구한말 박중양이 다른 문서나 서예 작품에 남긴 필적을 대조해보니, 획 처리 방식 등에서 비슷한 특징이 나타나 박중양 글씨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박물관 쪽 자료를 보면, 작품에 남은 인장 머리 부분 ‘두인’에서 1932년 서예가 김태석(1874∼1951)이 박중양에게 새겨준 것으로 알려진 인장 문구와 일치하는 내용이 판독됐다. 또 작품 왼편에 작은 글씨로 쓴 ‘한인’은 대한제국 시기 일본으로 유학 간 학생이나 방문자가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앞에서 국적을 밝힐 때 썼던 말이라고 한다. 박중양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6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에서 유학한 것으로 확인돼 ‘한인’ 표현을 쓴 시기 및 정황과 맞아떨어진다는 설명이다.
박중양의 회고록 ‘술회’와 ‘대한제국관원이력서’(1972)에 실린 일본 유학·러-일 전쟁 통역관 활동 기록 등이 일본 쪽 사찰 기록에 남은 당대 박원근이란 이의 행적과 맞아떨어진다는 점도 박중양이 일본 유학 시기까지 박원근 이름을 썼다는 유력한 근거다. 박중양은 유년기 ‘통감’ ‘맹자’ 등 한문 고전을 익혔고, 박원근 이름으로 활동한 일본 유학 시절 여러 지역을 돌며 휘호를 팔아 경비를 충당했다는 기록도 확인됐다. 문제가 된 전시 출품작과 해외 경매 사이트에 떠도는 박원근 명의 작품들도 당시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지하조직 활동 등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른 독립지사 박원근이 국외에 유통될 정도로 여러점의 글씨 작품을 남기고 일본인을 위해 휘호했다는 것은 삶의 궤적과 거리가 있어, 박중양 글씨임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정황으로 판단된다고 박물관 쪽은 풀이했다.
박물관은 ‘우리들의 밥상’전 개막 뒤 ‘일반시국은’을 충북 보은 출신 지사 박원근의 작품으로 공식 명기해 내보였고, 내력을 알게 된 후손이 전시된 작품 앞에 찾아와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글씨나 그림을 마무리할 때 찍는 도장인 ‘낙관’에 표기된 이름 ‘박원근’이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과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낸 친일인사 박중양의 젊은 시절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이 제보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자 박물관 쪽은 지난달 10일 작품을 내렸고, 이틀 뒤 누리집에 유홍준 관장 명의로 전시품 검증 미흡에 대해 국민과 유족께 사과드린다는 공지문을 올린 바 있다.
박물관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애국지사 박원근 유가족께 조사 경위와 결과를 설명하고 거듭 사과드릴 예정”이라며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전시 내용에 대한 사전 검증을 강화하고 근현대사 분야 전문가 풀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알렸다. 유 관장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은 박물관이 국민 앞에 지켜야 할 기본적 책무인데 미흡했다”며 “유가족과 국민께 다시 한번 송구한 마음을 전하며, 전시품 검증 절차를 더욱 강화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