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형 소매치기에서 밀정으로…납치극 반전 완성한 열연

인상적인 것은 목소리의 크기보다 그 앞뒤를 잇는 연기다. 납치는 구국단이 밀정의 자질을 시험하려 꾸민 일이었고, 가경은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던 모습에도 계산이 있었던 셈이다. 김유정은 겁먹은 눈빛에서 결연함을 끌어낸 뒤 시험의 허점을 지적하는 냉정함으로 다시 분위기를 바꾼다. 반전이 밝혀진 뒤에는 앞선 표정까지 새롭게 읽힌다.
1932년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100일의 거짓말'에서 가경은 처음부터 독립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다. 소매치기로 살아가며 미국으로 떠날 돈을 구하던 그가 유소란(김현주)과 거래한 끝에 총독부 통역생 금서희로 잠입한다. 거창한 신념보다 제 삶을 바꾸려는 욕망이 먼저인 인물이다.
김유정은 그 생존력을 경쾌하게 표현한다. 공손한 일본어로 인사하다 영어로 추궁에 맞서고, 필요할 때는 부산 사투리까지 꺼내 든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양자 사토 히데오(박진영)가 자신을 의심하자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요"라고 받아치는 장면에서는 능청스러운 태도가 웃음과 설렘을 만든다. 가경에게 거짓말은 궁지에서 벗어나는 기술이고, 김유정에게는 장면의 흐름을 바꾸는 연기의 기회다.
구국단의 시험 뒤에는 그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자신을 의심한 이들에게 분노하다가도 죽은 딸의 이름을 빌려줬다는 유소란의 고백 앞에서 흔들린다. 밀정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바뀌는 과정에는 누군가의 간절함에 반응하는 마음이 있다. 김유정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말과 상대를 바라보는 표정 사이에 차이를 두며 그 변화를 연결한다.
이런 감정의 축적과 폭발은 '친애하는 X'를 기점으로 더욱 뚜렷해졌다. 김유정은 이 작품에서 타인을 이용해 정상에 오르려는 백아진을 연기했다. 피로 얼룩진 채 울 듯 웃던 얼굴, 상대를 매섭게 몰아세우다가 다시 붙잡는 태도에는 여러 감정이 겹쳐 있었다. 김유정은 그 모순을 한 사람의 얼굴 안에 모으며 익숙한 인상을 바꿨다.
가경은 그 역량을 다른 방향으로 쓴 인물이다. 백아진이 타인의 마음을 이용했다면 가경은 타인의 고통 때문에 제 계획을 바꾸기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살아남으려 가면을 쓰지만, 가면 뒤에서 움직이는 마음은 다르다. 김유정은 냉정한 생존 본능과 버리지 못한 연민을 함께 남겨 전작의 강렬함을 반복하지 않는다.
16부작 대장정에서 맨 앞에 이름을 올린 김유정은 가경의 선택을 통해 시청자를 시대의 한복판으로 데려가야 한다. 첩보의 긴장을 살리고 로맨스의 여지를 남기면서 인물의 변화까지 쌓아야 하는 자리다. 지난 네 회는 그 중심을 맡길 만한 근거를 보여줬다.
가경의 신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제 한 몸 지키기에 급급했던 마음이 누구를 향해 뻗어갈지도 남아 있다. 시험을 통과하려 외친 만세가 앞으로 어떤 선택으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김유정은 이미 그 한마디에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할 힘을 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