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석 | 문화비평가
팔월 땡볕의 산책만큼 버거운 건, 직장인들이 쏟아지는 정오의 한끼다. 왜 이때 나왔을까? 스스로를 야단치며 샌드위치를 사 으슥한 공원 벤치에 앉았다. 이 날씨에 여기 오는 사람은 없겠지? 샌들을 벗고 맨발을 화단에 걸치는데 수풀 너머로 어수선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유치원 모자를 쓴 아이가 대뜸 인사했다. 놀라 내 뒤를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헤헤, 안녕하세요.” 아이가 잠자리채를 흔들며 다가왔다. “아, 안녕? 잠자리 잡니?” “아니요. 매미 잡아요.” 예전의 나라면 신이 났겠지. 아이를 번쩍 들어 나무 위의 매미를 잡고, 스케치북에 여치, 메뚜기, 방아깨비, 땅강아지 등 내가 잡고 놀았던 곤충들을 그려주며 떠들었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전 스마트폰에서 본 글을 떠올렸다. ‘인근을 배회하던 남성이 음악과 인형으로 아이들을 유인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나는 땀에 젖어 꾀죄죄한 스스로의 행색을 돌아봤다.
그때 수풀 너머로 유치원 선생님과 잠자리채를 든 아이들이 보였다. “너, 선생님이 찾으시겠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아이가 있다. 또래보다는 어른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세상엔 그런 어른도 있다. 또래의 사람보다는 애들이 훨씬 잘 달라붙는. 결국 나는 수풀 사이로 비쳐든 해를 핑계로 일어났다. “오늘 참 덥네. 너도 밖에 오래 있으면 안 돼.”
돌아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스스로를 검열했을까? 혼자였기 때문이다. 다른 여성이나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누군가 혼자 산다면 가족들은 안전에 대해 걱정한다. 젊은 여성이나 노인들은 더 그럴 것이다. 배부른 소리겠지만 혼자 사는 중년 남성에겐 반대의 고민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얼마 전 여대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꽹과리 소리가 났다. 풍물놀이라도 하나? 마침 아이의 손을 잡은 부부가 교문 안으로 들어가길래 뒤를 따라갔다. “어이! 어디 가십니까?” 경비원이 달려와 나를 잡았다. “안에서 공연 같은 걸 하나 해서요.” “외부인은 못 들어가십니다.” 험한 세상이니 납득은 했다. 다만 내가 몰래 숨어들려던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아, 저기 가족들이 들어가길래.” “거긴 가족이고요.”
딱히 사람을 차별하냐고 따지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경비원이 말하는 가족의 범주는 ‘재학 중인 학생의 가족’일까, ‘일반적인 구성의 가족’일까? 물어보진 않았지만 후자일 것이다. 내 앞의 가족에겐 누굴 찾아왔냐 물어보진 않았으니까. 혼자는 위험하다. 혼자인 여성과 노인은 피해를 당할까 위험하고, 혼자인 남성은 가해를 할까 위험하다.
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나? 화내는 사람도 있겠다. 학교 강의를 갈 때 ‘범죄전력조회동의서’를 내란다고 발끈하는 작가도 보았다. 나는 청소년 책을 들고 백여군데 학교를 다녔는데, 오히려 그 서류로 무해함을 인정받아 다행이라 여겼다. 스마트폰 하나로도 충분히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럼에도 억울함과 찜찜함은 남았다. 그래서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봤다. 내가 두려움을 느낄 때는 없는가? 내가 사는 용산엔 외국인이 많다. 여름밤 골목길에서 우락부락한 웃통을 까고 노는 그들을 보면 몸이 움츠러든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노려보는 건 반대의 이유일 수도 있다. 에어컨 없는 열대야를 어떻게든 이겨 보려 나와 있는데, 저 남자가 경찰을 불러 귀찮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그렇게 잠재적 피해자는 다른 잠재적 피해자를 두려워한다.
완전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기란 요원하다. 그래도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이 아저씨가 무해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방법은 찾아야겠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차분하게 걷고, 눈이 마주치면 인사하고, 길을 가면서 검은 봉지 속 무언가를 우적우적 먹지 않는다. 고양이가 궁금해도 남의 담을 넘보지 않고, 초등학생의 가방이 귀여워도 사진을 찍지 않는다. 혼자인 여성과 같은 골목에 들어서면 앞질러 가는 편이지만, 요즘은 주력이 굉장한 분들이 많아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때론 겁 많고 신고 정신 투철한 아저씨처럼 보일 때도 필요하다. 택배원인지 스토커인지 모를 사람이 건물 입구를 배회하면 어딜 찾냐고 물어본다. 남의 집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면 빤히 쳐다본다. ‘꽁초를 배수구에 버리실 건 아니죠’라고 대놓고 물어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