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이 2개월 앞으로 다가온 러시아에서 야권 인사들의 출마 길이 막히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국민 피로감이 커지는 가운데, 당국이 여론의 균열 노출하지 않도록 야당 출마를 차단하는 모양새다.
르몽드는 오는 9월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총선에 출마하려던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 보리스 나데즈딘(63)이 17일(현지시각) 모스크바 교외 돌고프루드니 법원에서 1000루블(1만9000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 그는 ‘극단주의 상징’을 전시해 행정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았다. 러시아 법원은 헌정질서·안보를 해치거나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행위를 극단주의로 보고 처벌한다. 러시아 선거법상 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총선에 입후보할 수 없다.
2023년 그가 운영하는 텔레그램 채팅방에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사진이 10여초 들어간 영상이 올라온 게 문제가 됐다. 나발니는 2021년 법원에서 ‘극단주의’ 선동 혐의로 징역 19년을 선고받은 뒤 2024년 교도소에서 돌연사한 인물이다.
앞서 지난 10일에는 러시아 법무부가 나데즈딘을 ‘외국 대리인’ 목록에 올렸다. 러시아는 2012년 외국에서 지원 등을 받은 단체를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하는 법을 제정했다. 외국 대리인은 온라인에 글을 올릴 때 외국 대리인임을 밝혀야 하는 등 당국 통제를 받는다. 이후 법 개정을 거치며 개인도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외국 대리인에 오른 개인은 선거 출마 자격이 박탈된다.
나데즈딘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의 보좌관 출신이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9월 선거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유일한 후보’를 자처하며, 후보 등록을 위한 지지 서명을 모으고 있었다. 나데즈딘은 이날 재판 결과를 기다리던 30여명의 지지자에게 “우리는 병든 국가에 살고 있다”며 “이 모든 서커스는 (내가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꾸며진 것”이라고 토로했다.
출마 길이 막힌 야권 인사는 나데즈딘만이 아니다. 지난달부터 자유주의 성향의 야당 ‘야블로코’ 소속 인사 32명이 법원 판결이나 외국 대리인 지정으로 피선거권을 뺏겼다고 르몽드는 전했다. 이 정당 부대표 막심 크루글로프의 경우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부차, 마리우폴 등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를 비판하는 게시물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가 지난달 24일 ‘극단주의 상징 사용’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유력한 야당이 없는 러시아 총선에서는 여당 ‘통합러시아’가 과반 넘는 의석을 가져가는 승리가 확실시된다. 하원에는 야당 러시아공산당이 있지만 이들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권을 비판하는 일이 드물다. 야블로코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일부 도시 시의원만 있는 원외 정당이다. 프랑스 리베라시옹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정권은 정치 탄압을 크게 강화해 비판자 수백명을 투옥했다. 이제 (정부에 비판적인) 야권 인사 거의 전원이 수감됐거나 사망했거나 망명 중”이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정권이 야권 정치인의 출마를 더욱 틀어막는 건 최근의 여론 동요 탓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5년째 이어지면서 전쟁에 대한 피로가 커지고 지지는 떨어지는 추세다. 러시아 비정부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가 7일 공개한 월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평화 협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 비율은 64%로, 첫 조사 때인 2022년 9월(48%)보다 16%포인트 늘었다. ‘군사 행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같은 기간 44%에서 29%로 15%포인트 줄었다. 평화 협상을 지지한다는 응답 비율은 징집당할 위험이 큰 25살 미만 청년층(78%)과 농촌 주민(71%) 사이에서 특히 높았다.
르몽드는 “러시아 당국이 사소한 반대 목소리까지 침묵시키려 집요하게 나서는 건, (푸틴) 대통령이 지속하는 전쟁에 국민 상당수가 지치면서 그들(정권)의 불안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