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춤으로 되살아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티프로 한 창작극 ‘춤, 화찬’ 공연 장면. ⓒ황필주(Studio79)

초대형 미인도가 투사된 무대, 순백 한복 차림의 무용수가 빈 화폭 앞에 주저앉아 깊은 상념에 잠긴다. 한동안 미동도 없다. 징의 묵직한 울림에 따라 미세한 춤사위를 펼치던 그는 붓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 그리기 시작한다. 가슴 깊이 묻어둔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나고, 무대는 조선의 어느 장터로 이동한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그림 속 인물들이 한국 춤으로 부활했다. 국립국악원은 지난 16~17일 서울 서초동 풍류사랑방에서 신윤복의 회화를 모티프로 한 무용극 ‘춤, 화찬’을 선보였다. 대표작 ‘미인도’ 탄생 과정을 상상력으로 풀어내며 그가 남긴 여러 풍속화를 무대 위로 불러내 그림 속 인물의 동작을 춤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티프로 한 창작극 ‘춤, 화찬’ 공연 장면. ⓒ황필주(Studio79)

작품은 머리에 가채를 얹고 화려한 복식을 갖춘 여성을 섬세하게 그려 19세기 조선 미인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 ‘미인도’ 속 인물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서 영감을 얻어, 그가 신윤복이 사랑한 기녀 보배라는 상상을 얹었다. 신윤복과 보배가 장터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싹틔우고 잠시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권력자이자 부호인 강 대감 일가의 탐욕과 딸의 삶보다 이익을 앞세운 아버지의 강요에 두 사람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고, 그 사무치는 그리움이 신윤복의 붓끝에서 한폭의 예술 작품 ‘미인도’로 승화됐다는 설정이다. 김충환 연출은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온 화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안의 인물들은 지금도 저마다 표정과 몸짓으로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며 “혜원 신윤복은 과연 무엇을 보았기에 이토록 생생한 장면을 남길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이르렀고, ‘미인도’ 속 여인에게 보배라는 이름을 붙여보고, 화공 혜원과 그녀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춤으로 이어봤다”고 밝혔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티프로 한 창작극 ‘춤, 화찬’ 공연 장면. ⓒ황필주(Studio79)

작품은 ‘노상탁발’ ‘청금상련’ ‘무무도’ ‘월하정인’ ‘유곽쟁웅’ ‘쌍검대무’ ‘사시장춘’ 등 신윤복의 대표 풍속화 7편을 극의 흐름에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정지된 그림 속 인물에게 감정과 시간을 부여하고, 부채입춤, 한량무, 쌍검대무, 수건입춤, 장구춤, 살풀이춤 등 다양한 한국 춤으로 등장인물의 사랑과 욕망, 상실과 그리움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길 위에서 탁발하는 승려들과 기녀들이 마주치는 장면을 담은 ‘노상탁발’은 각설이춤, 탁발춤, 승무를 결합한 장터를 펼쳐내며 신윤복과 보배가 처음 마주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연꽃 만발한 연못가에서 가야금 연주를 감상하는 모습을 담은 ‘청금상련’, 초가에서 무당이 굿을 하는 ‘무무도’, 초승달 아래 담 모퉁이에서 은밀히 만나는 남녀를 그린 ‘월하정인’은 두 사람이 사랑을 키워가는 무대다. 부채입춤, 무당춤, 한량무, 보배의 춤 등이 화려한 조명, 영상, 무대 미술과 결합해 생기 넘치는 장면을 펼쳐낸다. 특히 ‘월하정인’은 풍속화를 그대로 무대에 옮겨 놓은 듯했다. 그림 속 정인처럼 극 중 신윤복과 보배가 달빛 아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아름다운 순간으로 묘사한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티프로 한 창작극 ‘춤, 화찬’ 공연 장면. ⓒ황필주(Studio79)

반면 기방 다툼을 그린 ‘유곽쟁웅’과 세도가의 연회에서 두자루의 검을 들고 춤을 추는 ‘쌍검대무’는 강 대감 일가의 권력과 욕망을 표현하고, 두사람의 시련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한다. 특히 산기슭 한적한 정자 마루에 놓인 두켤레의 신발로 방안 남녀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사시장춘’은 강 대감 방으로 들어간 보배와 바깥에 남겨진 꽃신 앞에서 좌절하는 신윤복의 상실과 비애를 상징하는 정반대 장면으로 재해석했다.

‘춤, 화찬’은 한국 춤, 음악, 무대 영상을 잘 버무려 예술가 신윤복에게 건넨 찬사였다. 작품은 신윤복 회화 속 동작을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각종 춤사위로 생동감 있게 살려내는 데 머물지 않는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이 가야금, 거문고 연주와 판소리, 민요 등으로 신윤복 그림에 입체감을 더하며 춤과 회화의 경계를 지우고, 관객에게 이색적인 경험과 깊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티프로 한 창작극 ‘춤, 화찬’ 공연 장면. ⓒ황필주(Studio79)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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