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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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늘 인간보다 먼저 철학자가 됐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왔다가 물러가며 기다림을 가르치고, 조류는 방향을 바꾸며 순응의 지혜를 알려준다. 그리고 성게는 말없이 자신의 삶으로 승리의 비밀을 보여준다.
◇ 겉은 가시, 속은 황금
검은 가시를 빽빽하게 세운 성게를 처음 마주하면 누구나 한 걸음 물러선다. 바닷속 바위에 붙어 있는 모습은 위협적이고 차갑다. 그러나 단단한 껍질을 열어 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부드러운 알이 고요하게 숨어 있다. 겉은 거칠고 속은 부드럽다. 강한 듯 보이지만 가장 연약한 생명을 품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했다. 가장 뛰어난 것은 오히려 서툰 듯 보인다는 뜻이다. 성게는 그 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바다의 생명체다. 화려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바다를 지켜 왔다. 빠름보다 오래 살아남는 힘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증명한 존재다.
우리 조상은 성게를 여름 별미로만 보지 않았다. 옛 문헌에는 해구(海毬), 해위(海蝟), 율구합(栗毬蛤)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제주에서는 지금도 '구살'이라 부른다. '본초원시'에는 심통을 다스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의학에서는 성게의 껍질과 알을 해담(海膽)이라 하여 약재로 사용했다.
한의학에서 성게는 맛이 짜고 성질은 치우침 없이 무난한 재료로 본다. 몸에 자극이 세지 않아 부담 없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주로 간과 비장, 위장에 작용한다고 여겨진다. 오래 쌓여 딱딱하게 뭉친 것을 부드럽게 풀어 주고, 가래와 부기를 가라앉히며, 기운을 북돋운다는 것이 전통적인 풀이다.
양생의 오랜 원리 가운데 '통하면 아프지 않고, 막히면 아프다'는 말이 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잘 흘러야 건강하다는 뜻이다. 피가 돌고 기운이 돌고 마음이 트여야 탈이 없다. 성게의 짠맛은 물의 기운에 해당하는데, 물은 아래로 흐르며 막힌 곳을 적시고 길을 낸다. 성게가 몸속에 뭉친 응어리를 풀어 준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느림이 남긴 힘, 그리고 저속노화
현대 영양학 역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성게에는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하며 DHA와 EPA 같은 오메가3 지방산이 들어 있다. 타우린과 비타민A, 비타민B군, 아연과 철분도 함유하고 있다. 이러한 성분은 혈관 건강과 면역력 유지, 피로 회복에 도움을 준다.
최근 건강 분야에서 주목받는 화두 중 하나는 저속노화다. 노화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노화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그 핵심은 염증을 줄이고 세포 손상을 완화하는 데 있다. 성게에 풍부한 오메가3 지방산과 카로티노이드 성분은 이러한 관점에서 의미 있는 영양 자원이 된다. 물론 어떤 음식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저속노화는 특정 식품 하나가 아니라 균형 잡힌 식생활과 적절한 운동, 충분한 수면이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다만 제철 성게 한 숟가락이 몸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며 건강한 노화의 길에 힘을 보태는 것은 분명하다.
성게는 바다에서 가장 느린 생물 가운데 하나다. 물고기처럼 헤엄치지 못하고 문어처럼 영리하게 숨지도 못한다. 조개처럼 단단한 껍데기에 숨어버릴 수도 없다. 그저 가시를 세우고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나 성게는 멸종하지 않았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했고, 빠르지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며, 대신 가시를 선택했다. 남과 경쟁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현대인은 늘 가장 빠른 길을 찾는다. 가장 빨리 성공하는 법, 가장 빨리 돈 버는 법, 가장 빨리 젊어지는 법을 찾는다. 그러나 자연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씨앗은 땅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야 싹을 틔운다. 겨울을 통과한 나무만 봄꽃을 피운다. 숙성되지 않은 과실은 향기를 내지 못한다. 오래 살아남는 힘은 결국 기다림에서 나온다.
◇ 성게 밥상의 음양과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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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성게 요리 중에 성게 회를 살펴봤다. 갓 잡은 성게를 숟가락으로 떠서 먹으면 바다 전체가 입안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별다른 양념이 필요 없다. 과도한 조미료는 오히려 성게의 맛을 가린다. 본질을 흐리지 않는 정확함, 성게 회의 맛은 꾸밈없는 정확함의 맛이다.
성게국은 또 다른 철학을 품고 있다. 제주에서는 예부터 성게국을 귀한 손님에게 내놓았다. 넉넉한 인심은 성게국 한 그릇에 담겼다. 성게에서 우러난 감칠맛은 바다의 양(陽)이고 국물은 물의 음(陰)이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맛도 건강도 완성된다.
성게미역국은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미역은 바다의 음을, 성게는 바다의 양을 대표한다. 미역의 알긴산은 노폐물 배출을 돕고 성게의 아미노산은 기력을 보충하니, 산후조리 음식으로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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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게비빔밥은 조화의 철학이다. 따뜻한 밥 위에 성게알을 올리고 참기름과 김가루를 더해 비벼 먹는다. 각각의 재료는 따로 있을 때보다 함께 어우러질 때 더욱 빛난다.
성게국수는 흐름의 음식이다. 맑은 육수 속에서 면발은 물길처럼 이어지고 그 위에 얹힌 성게알은 바다의 향을 더한다. 성게젓갈은 기다림의 교과서다. 갓 잡은 성게는 바로 먹어도 맛있지만 젓갈은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깊은 맛이 생기지 않는다. 젓갈의 깊은 풍미는 조급함이 아닌 인내가 만든 결실이다.
성게전은 조화의 미학이다. 부추와 당근을 넣은 반죽에 성게알을 섞어 부치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존재한다. 노자가 말한 유약승강(柔弱勝剛强), 곧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철학이 떠오른다. 성게찜은 자연 그대로의 음식이다. 강한 양념도 복잡한 조리도 필요 없다. 다듬어지지 않은 통나무처럼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는 박(樸)의 철학과 같다. 최고의 음식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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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성게는 바다 생태계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균형을 요구한다. 성게가 지나치게 늘어나면 다시마와 해조류를 과도하게 먹어 치워 갯녹음을 일으킨다. 바닷속 숲이 사라지고 생태계가 흔들린다. 건강도 자연도 삶도 한쪽으로 치우치면 오래갈 수 없다.
노자는 자연을 따르라 했고, 황제내경은 막힌 것을 풀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양생학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법을 말한다. 성게 한 알 속에는 이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 제철 성게 한 숟가락에는 바다의 정기와 세월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 맛을 음미하는 순간 우리는 바다를 먹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들려주는 양생의 철학을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느림으로 살아남고, 조화로 성장하며, 균형으로 오래가는 삶. 그것이 성게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바다의 지혜이며, 저속노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전하는 가장 오래된 가르침일 것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