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투자 확대로 반도체 가격과 수출기업 이익이 함께 뛰면서 이번 교역조건 개선은 과거 유가 하락 때보다 소비와 투자를 끌어올리는 힘이 강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성장의 과실이 반도체 기업과 고소득·고자산층에 집중돼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효과는 제한될 수 있다는 한국은행 분석이 나왔다.
한국은행은 19일 발간한 ‘이번 교역조건 개선은 왜 다른가: 반도체 경기 호조의 실물경제 파급영향’ 보고서에서 반도체 호황이 교역조건과 국내총소득(GDI)을 끌어올리며 향후 내수 회복을 뒷받침할 것으로 진단했다. 다만 한은은 보고서 내용이 기관 공식 견해가 아닌 집필자 개인 견해라고 밝혔다.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년동기대비 3.8% 증가했지만 실질 GDI는 13.2% 늘었다. 두 지표의 성장률 격차는 9.4%p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60년 이후 가장 컸다.
GDP가 국내에서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나타낸다면 GDI는 수출가격과 수입가격 변화를 반영한 실질 구매력에 가깝다. 같은 양을 수출해도 반도체 가격이 오르면 국내 경제가 해외에서 사들일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이번 교역조건 개선이 과거와 다른 핵심은 수입품을 싸게 사서가 아니라 수출품을 비싸게 팔아서 소득이 늘었다는 점이다.
2009년과 2015년부터 2016년, 2020년의 교역조건 개선은 금융위기·셰일오일 증산·코로나19 등에 따른 국제유가 하락이 주된 원인이었다. 당시 GDP와 GDI 성장률 격차는 1.5%p에서 2.4%p에 그쳤다.
반면 올해 1분기에는 수출물가가 14.9% 상승해 수입물가 상승률 5.4%를 크게 웃돌았다.
이를 사실상 반도체 한 품목이 주도했다. 1분기 반도체 가격은 전년동기대비 92.5% 급등했고 반도체를 포함한 IT 부문이 전체 수출물가 상승분의 73.4%를 차지했다.
중동 전쟁 등으로 국제유가가 올랐는데도 순상품교역조건지수는 22.8% 개선됐으며, 교역조건 개선으로 발생한 실질무역이익은 GDI의 6.3%로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최근 수출 실적도 보고서의 판단을 뒷받침한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지난 6월 수출은 전년동월대비 70.9% 증가한 1022억5000만달러로 월간 기준 처음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반도체 수출은 199.5% 늘어난 448억2000만달러로 처음 400억달러를 돌파했다.
반도체를 제외한 수출도 28% 증가해 수출 회복이 완전히 반도체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행이 소비 증가 가능성을 과거보다 높게 보는 이유는 이번 소득 증가가 일시적인 유가 변동이 아니라 AI 확산에 따른 구조적 수요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과거 수입가격 하락형 교역조건 개선기에는 가계가 늘어난 구매력을 일시소득으로 인식해 소비보다 저축을 늘리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수출가격 상승이 교역조건을 개선했던 시기에는 기업 매출과 임금이 함께 오르면서 소비가 유의미하게 증가했고 투자도 시차 없이 확대된 것으로 분석됐다.
주가 상승에 따른 자산효과도 소비를 뒷받침할 수 있다. 보고서는 지난해 가계가 주식과 펀드에서 얻은 자본이득이 400조원을 넘어 가계총처분가능소득 1508조원의 약 1/4에 달한 것으로 추산했다.
팬데믹 이전인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연평균 1조3000억원 수준이던 가계 주식 순매입액도 2020년부터 2025년까지는 연평균 63조6000억원으로 뛰었다. 반도체 기업의 실적과 주가 상승이 과거보다 더 많은 가계의 자산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가 된 셈이다.
문제는 돈을 번 계층과 실제로 소비를 늘리는 계층이 다르다는 데 있다. 올해 4월 기준 IT 제조업 종사자는 전체의 2.6%에 불과하고 최근 임금 상승과 성과급 지급은 대기업·고소득 근로자에게 집중돼 있다.
주식 자본이득도 고자산층에 편중됐다. 보고서가 추산한 주식 자산효과는 자산 하위 1·2분위가 0.14였지만 상위 4·5분위는 0.01에 그쳤다. 가령 주가 상승으로 주식 자산이 100만원 늘었을 때 하위 1·2분위는 14만원 소비를 늘리고, 상위 4·5분위는 1만원을 늘린다는 거다. 자산이 많은 계층일수록 주가가 올라도 추가 소비로 연결되는 비율이 낮다는 의미다.
투자는 소비보다 직접적인 효과가 클 전망이다. 주요 예측기관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자본지출이 지난해 75조원에서 올해 120조원, 내년 150조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과거 유가 하락기에는 비용이 줄어든 뒤 기업이 약 3분기의 시차를 두고 투자를 늘렸지만, 현재는 AI 반도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능력을 서둘러 확대해야 해 투자 집행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
다만 반도체 설비투자 증가액이 그대로 국내 생산과 고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은 제조장비 투자의 약 6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 등 해외 생산기지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출한 자금의 상당 부분이 수입 장비업체나 해외 공장으로 흘러가면 국내 설비투자 통계는 늘어도 국내 중소기업 매출과 고용에 미치는 효과는 약해질 수 있다.
우리 경제의 반도체 편중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전체 제조업 생산에서 IT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 30% 미만에서 올해 1분기 51%로 높아졌고, 전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8.8%에 이르렀다.
그러나 IT 제조업은 다른 업종보다 생산·취업유발효과가 낮고 경기 변동성은 크다. 수출과 GDP가 빠르게 증가해도 고용과 체감경기가 같은 속도로 회복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재정에는 당장 호재다. 반도체 기업의 이익과 성과급이 늘면 법인세와 근로소득세가 증가하고 증시 거래 확대는 증권거래세와 농어촌특별세 수입을 끌어올린다. 명목GDP가 빠르게 증가하면 정부·가계 부채비율도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반도체 수출과 총 국세 증가율의 상관계수는 2010년부터 2019년까지 0.27에서 2010년부터 2025년까지 0.55로 높아졌다. 이는 곧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기업 실적과 세수가 동시에 급감해 재정 운용의 변동성도 커진다는 의미다.
보고서의 낙관적 전망을 확정적인 결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한국은행이 2002년 1분기부터 2025년 4분기까지 분석한 기간 중 수입물가가 교역조건을 이끈 사례는 20회였지만 수출물가가 주도한 사례는 5회에 불과했다.
수출가격 상승형 국면에서 소비와 투자가 더 크게 증가했다는 추정은 표본 자체가 적어 불확실성이 크다는 것이 보고서의 설명이다.
결국 반도체 호황은 한국 경제에 벌어들인 돈의 크기를 키우지만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반도체 이익이 국내 소재·부품·장비 투자와 연구개발, 고용 확대로 연결되면 GDP와 GDI의 격차가 내수 회복으로 좁혀질 수 있지만, 해외 설비와 부동산·금융자산으로 집중되면 성장률 숫자와 체감경기의 간극만 커질 수 있다.
한국은행은 반도체 생태계의 국내 연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자금이 부동산 등 비생산적 부문으로 유입돼 금융불균형을 확대하거나 다른 핵심산업의 인력과 투자를 빨아들이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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