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서바이벌 ‘최후의 인류’ 만든 이미솔·박진우 EBS 피디

“이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즉시 애리조나 소노라 사막으로 집결하라.”
때는 2038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인류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형 산불은 대륙을 집어삼켰고, 극단적인 폭염과 가뭄으로 수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 도시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국제연합(UN)은 기후위기가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전례 없는 재난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4일 첫 방송 된 한국교육방송(EBS)의 ‘최후의 인류’는 바로 이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시작한다. 인류 절반이 사라진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은 7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받고 미국 애리조나 사막으로 향한다.
배우 유승호와 코미디언 이은지, 가수 비비, 지구과학자 김한결, 뇌과학자 장동선, 화학자 장홍제 등 생존자들이 사막에서 처음 마주한 공포는 ‘갈증’이다. “경험하지 못한 목마름”(유승호)을 겪은 이들은 오염된 물을 여과하고 끓여 가까스로 갈증을 해소한다. 그리고 비로소 거대한 유리돔 실험기지 ‘바이오스피어 2’에 입성해 생존 미션에 뛰어든다. 넷플릭스 국내 시리즈 4위에 오르며 화제를 모은 리얼리티 서바이벌 ‘최후의 인류’를 만든 이미솔·박진우 피디를 지난 15일 만났다.

프로그램의 시작은 물리학도였던 이 피디가 16년 전 아버지의 권유로 읽은 책 한 권이었다. 1991년 애리조나 사막에서 진행된 ‘바이오스피어2’ 생존 실험에 참여했던 제인 포인터가 쓴 ‘바이오스피어2 인간실험 : 2년20분’이었다. 책에서 본 사진 한장은 오랫동안 이 피디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주황색 유니폼의 대원 8명이 거대한 유리 돔 안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35년 전 이들이 참여한 실험은 인공 바다와 열대우림 등이 구현된 축구장 2개 규모의 밀폐 시설 ‘바이오스피어2’에서 진행됐다. 대원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제2의 지구’에서 살아남는 미션에 도전했지만, 산소 부족 등을 겪으며 실험은 2년여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인간은 지구를 흉내 낼 수는 있었지만, 지구 자체를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이 피디는 “우리가 사는 지구의 시스템이 정교하기 때문이다. 우주를 꿈꾸며 실험에 참여했던 대원들은 결국 지구를 더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주를 향한 상상과 기후위기를 겪는 현재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며 기획 의도를 말했다.
제작진이 핵전쟁이나 소행성 충돌 대신 기후위기를 종말의 원인으로 택한 것은 현실에서 이미 시작된 변화를 조금 더 밀어붙인 미래가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 피디는 “현실감 있는 종말 서사를 만들고 싶었다”며 “폭염과 산불, 홍수처럼 이미 변화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쉽게 이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후의 인류’ 속 미션도 현실과 맞닿아 있다. 참가자들은 숨을 쉬기 위한 ‘폐’를 찾고, 황폐해진 토양을 되살리며, 식량을 구해야 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실제 기후위기와 연결된 과제가 주어진다. 박 피디는 “기후위기를 설명하는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출연자들이 직접 ‘고장’ 난 지구를 체험하고 시청자도 함께 그 감각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바이벌이지만, 이 프로그램엔 탈락자가 없다. 제작진도 처음에는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전형적인 서바이벌을 검토했지만, 바이오스피어2를 이해할수록 생각은 달라졌다. 박 피디는 “바이오스피어2라는 공간을 이해할수록 결론은 협력이었다”고 말했다. 폐쇄된 생태계 안에서는 모두의 능력을 끌어모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배우와 과학자, 의사와 코미디언 등 서로 다른 배경의 출연진을 한 팀으로 구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후위기가 특정 전문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는 판단에서였다.

촬영 과정은 또 다른 생존 실험이었다. 바이오스피어2는 지금도 연구가 진행 중인 시설로, 외부인이 가져온 소품 하나, 카메라 위치 하나도 생태계와 연구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제작진은 바이오스피어2를 관리·감독하는 애리조나대 쪽과 수개월 동안 촬영 방식과 미션을 조율해야 했다. 애리조나대 쪽은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줄 알았다가 ‘리얼리티 서바이벌’이라는 설명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공간의 특수성 탓에 촬영 현장에선 예상치 못한 변수도 이어졌다. ‘폐’를 찾는 미션을 수행하던 2부에서 참가자들은 힌트 퍼즐을 찾아야 했다. 인공 바닷속에 퍼즐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 이낙준 작가가 직접 바닷속으로 뛰어들려 하자, 제작진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박 피디는 “시설 관리자에게 한국 술까지 사주며 설득했는데도 인공 바다에 들어가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했다”며 “이 작가가 뛰어들까 봐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장홍제 교수가 먼저 퍼즐 조각을 찾아내며 상황은 일단락됐다.
제작진은 출연진들이 ‘축소판 지구’를 직접 겪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국 애리조나에서 생존 관련 촬영을 한다는 설명만 하고 자세한 내용은 비밀에 부쳤다. “검색도, 공부도 하지 말라”는 주문으로 갈음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장홍제 교수는 위장복을 입고 도끼까지 챙겨왔다. 이 피디는 “특히 첫 미션에서 김한결 박사가 총용존고형물(TDS) 측정기를 꺼내 수질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며 “평소에도 그런 장비를 들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방송 초반에는 과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제작진은 후반부로 갈수록 식량과 토양, 에너지 등 일상적인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비과학자들이 활약을 보인다고 귀띔했다. 이 피디는 “미션의 우승자는 시드를 받는데, 시드 하나당 금 한돈 정도의 상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며 “우승자가 상금을 어떻게 쓰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말했다.
‘최후의 인류’는 8부작 시리즈로, 현재 4회까지 방송했다. 매주 목요일 밤 10시50분 교육방송에서 방영되며 이후 넷플릭스, 웨이브 등 오티티(OTT)에 공개된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