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번의 환호, 그리고 한 번의 눈물… 전설들의 마지막 무대 잠실구장
조영남의 '제비'가 울려 퍼지던 날, 윤동균이 회상하는 한국 야구 첫 은퇴식의 감동
은퇴식 없이 짐을 싼 김재박과 김동주…화려함 뒤의 씁쓸한 그림자

[두산 베어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대호 기자 = '백곰'이라는 별명으로 프로야구 원년부터 OB 베어스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윤동균(76) 전 감독은 1989년 8월 17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경기를 평생 잊을 수 없다.
당시 4위 진입의 고비인 롯데전에서 그는 4-2로 앞선 6회 무사 1루 상황에 타석에 섰고, 롯데 선발 김시진을 상대로 호쾌한 좌중간 1타점 2루타를 쳤다.
2루에 안착한 순간, 구장에는 그의 애창곡인 조영남의 '제비'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잠실구장에서 열렸던 프로야구 최초의 '은퇴 경기' 주인공인 윤동균 전 감독은 그날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순간을 기억한다.
윤 전 감독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은퇴식을 제안하신 분이 박용민 OB 베어스 사장이셨다. 일찍이 일본에도 계셨고 이런 은퇴식 문화를 쭉 지켜봐 오시다 보니 '한국에도 이런 걸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하셔서 저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렇게 은퇴식이 시작된 것"이라고 후일담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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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86년부터 플레잉코치로 지도자와 선수를 겸했던 윤 전 감독은 1989년에는 거의 선수로 뛰지 않았다.
그는 "은퇴 경기를 대비해서 몇 달 전부터 연습을 좀 하긴 했다. 마침 상대 투수가 김시진 선수였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경기 전에 '야, 하나만 좀 맞아 줘라'고 했는데 사실은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두 팀 모두 4강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걸린 경기였다. 그래서 김시진 투수도 전력으로 투구했다. 첫 타석은 삼진, 두 번째 타석은 투수 땅볼을 치고 세 번째 타석에서 2루타를 친 것"이라고 돌이켰다.
당시 이광환 OB 감독은 "삼진 먹어도 끝까지 안 뺄 테니 안타 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말했고, 그 약속 덕분에 윤 전 감독은 은퇴 경기에서 안타를 칠 수 있었다.
"빠른 직구를 받아쳤습니다.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미리 롯데 측에도 양해를 구했던 대로 경기가 중단됐죠. 조영남의 '제비'가 흘러나오면서 OB 선수들이 더그아웃에서 2루까지 양쪽으로 쭉 도열했어요. 대주자로 교체된 뒤 동료들과 하이 파이브 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죠. 지금 생각해도 아주 멋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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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전 감독은 은퇴식을 기념해 경기 전에는 직접 사인한 야구공 400개를 관중석에 던져줬고, 자비를 들여 승용차를 마련해 경기 후 경품 추첨으로 관중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그가 달았던 10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가 야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1994년 'OB 항명 파동' 때 해제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잠실구장 최초의 '은퇴식' 주인공인 윤 전 감독은 1982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공식 개막식에서 선수 대표로 선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누가 선서를 하느냐를 놓고 6개 구단에서 경쟁이 붙었어요. 서로 자기 구단 선수가 하겠다고 해서 여러 이야기가 오가다가 마지막에 나온 의견이 '제일 연장자가 하자'였죠. 따져보니 (OB에서) 연장자가 저랑 김우열 선수였는데, 제가 1949년 7월생이고 김우열 선수가 9월생이었죠. 그래서 제가 선서를 하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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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균의 은퇴식 이후 잠실구장은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숱한 전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작별의 무대가 됐다.
윤동균과 함께 원년 OB 우승을 이끌었던 '불사조' 박철순은 1997년 4월 29일 LG 트윈스와 경기에 앞서 잠실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정들었던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목숨 바쳐 사랑했던 여인과 첫 키스보다 더 진했다"고 남긴 명언은 잠실의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1994년 '항명 파동'의 앙금을 푼 윤 전 감독은 박철순의 은퇴식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의 등번호 21번은 5년 뒤인 2002년 4월 5일 잠실에서 공식 영구결번식이 거행되며, 박철순은 KBO 사상 은퇴식과 영구결번식을 모두 치른 최초의 선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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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은퇴식 문화는 점차 진화했다.
2017년 4월 30일 열린 홍성흔의 은퇴식은 친정팀 두산과 4년간 몸담았던 롯데를 모두 배려해 양 팀 맞대결 날짜에 맞춰 진행됐다.
최근인 2025년 7월 6일 kt wiz전에서는 '베어스 왕조 유격수' 김재호가 은퇴 특별 엔트리로 선발 출장한 뒤 후배 박준순에게 자신의 52번 등번호를 물려주는 '대관식'을 가졌다.
박준순은 입단 당시부터 김재호의 번호를 원했고, 그라운드 위에서 직접 유니폼을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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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두 가족' LG 역시 잠실에서 전설들과 뜨겁게 작별했다.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41번) 주인공인 김용수는 1999년 본인과 구단의 뜻에 따라 은퇴식을 생략했지만, 이후 2011년 팬들이 마련한 깜짝 행사로 아쉬움을 달랬다.
2017년 7월 9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야수 출신 최초로 영구결번(9번) 영예를 안은 이병규는 팀의 순위 싸움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일정을 7월로 앞당기는 'LG맨'다운 결정을 내렸다.
박용택은 2020년 은퇴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행사가 미뤄졌고, 2년이 지난 2022년 7월 3일 롯데전이 되어서야 성대한 은퇴식과 33번 영구결번식을 함께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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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전설이 잠실에서 박수받으며 떠난 것은 아니다.
MBC 청룡의 간판스타였던 김재박은 구단과 이견을 보이다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된 뒤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고, 두산의 상징이었던 김동주 역시 2014년 구단과의 마찰 끝에 은퇴식 없이 그라운드를 떠났다.
화려한 은퇴식의 빛 이면에는 이처럼 팀을 쫓기듯 떠나야 했던 전설들의 씁쓸한 그림자도 역사의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프로야구의 출발을 알리는 개막 선서가 울려 퍼진 지 44년이 흐른 2026년, KBO리그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 인기 프로 스포츠가 됐다.
선수 선서 이후 지나간 세월을 떠올리며 "야구인으로 행복했다"고 말한 윤 전 감독은 2032년 한국 야구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잠실 돔'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동안 정들었던 잠실구장이 너무 그리울 겁니다. 야구장은 생명이 없지만, 정말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몇 년 동안은 잠실구장이 그립겠지만, 새롭게, 멋지게 지어질 모습을 기대해야죠."
4b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