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준 | 정치데스크
“우리 주민들은 자신의 운명에 관계되는 중대한 결정이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 그리고 가까이할 수 없는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전국 어느 시·군·구의회에서도 감히 처리하지 못한 정보공개 조례안을 우리 청주시의회에서 입안 의결하여 지방자치 시대의 새 역사의 장을 여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우리나라 지방의회 의원의 선두 주자가 됩시다.”
1991년 7월24일 충북 청주시의회 본회의에 ‘청주시정보공개조례안’이 상정된 뒤 이어진 박종구 시의원의 조례안 제안 설명의 한 대목이다. 조례안은 ‘청주시 행정정보 공개 조례안’이라는 이름으로 그해 11월25일 가결됐다. “지방의회의 선두 주자가 되자”던 포부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내무부(현 행정안전부)와 청주시의 거센 반대를 뚫고 조례는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퍼졌고, 1996년 국회가 ‘공공기관의 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뉴노멀’이 됐다. 누구나 공공기관이 정보에 대해 공개를 요구할 수 있는 ‘정보공개청구제도’의 시작이었다.
기자를 하면서 자주 도움을 받았던 정보공개청구 제도가 한 지방의회의 용기에서 시작됐다는 사실 앞에 자세를 고쳐 앉게 됐다. 내친김에 다른 지방의회 회의록도 살펴봤다. 2003년 2월12일 경기 안산시의회 본회의 회의록에서 눈길이 멈췄다.
“안산시 6천여억 세금은 시민이 낸 것입니다. 한푼 한푼 정말 알뜰살뜰하게 써서 우리 시민들의 생활이 좀 더 나아지도록 쾌적한 주거환경, 교육 등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 지방자치의 확대는 시장이나 시의원들한테 많은 권한을 주겠다는 게 본뜻이 아니고 시민들의 참여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 분권을 강화하겠다는 겁니다.”
이날 ‘안산시 시장 등의 업무추진비 공개 및 지출에 관한 조례안’에 다른 시의원들이 업무추진비 집행 명세를 누리집이 아닌 사실상 시보에만 공개하도록 수정안을 내자 반대토론에 나선 이창수 의원이 한 말이다. 결국 이날 찬성 11명, 반대 9명으로 ‘반쪽짜리’ 조례안이 통과했지만, 이 의원 등은 다시 개정안을 발의해 그해 7월 시장의 업무추진비 사용 명세를 누리집과 시보 모두에 공개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지자체장의 업무추진비 공개를 의무화하는 전국 최초의 조례였다. 조례는 정부가 2011년 전국 지자체장 업무추진비 공개를 의무화하며 전국 표준이 됐다. 지금도 공공기관과 지자체장의 불투명한 업무추진비 사용이 문제가 되지만, 이 조례가 최소한의 제동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방의회가 만든 조례는 행정 권력 감시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바꾸는 디딤돌이 됐다. 2006년 처음으로 제정된 ‘거창군 학교급식 지원에 관한 조례’는 ‘무상급식’을 전국으로 퍼트리는 씨앗이 됐다. 2007년 부안군의 ‘치매 환자 의료비 지원에 관한 조례’는 돌봄이 개인의 책임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화두를, 2008년 서울 송파구의 ‘어린이 보호차량 인증에 관한 조례’는 아이들의 안전을 정부가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1991년 지방자치 부활 뒤 35년을 맞아 치러지는 6·3 지방선거로 시선을 돌리면 마음이 편치 않다. 올해 초 터져 나온 공천 비리와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의원들의 일탈에 지방의회에 대한 신뢰는 뿌리째 흔들렸다. 지역 현안보다 중앙정치 이슈가 선거 구도를 지배하는 현상도 되풀이됐다. 언론 종사자로서 중앙정치에 치우친 지방선거 보도를 이번에도 바꾸지 못해 자괴감도 느낀다.
그럼에도 박 의원처럼 지방정부를 감시하고, 지역의 삶을 바꾸려고 한표를 호소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한겨레 전국부가 연재한 ‘동네를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를 비롯해 여러 언론이 용기를 내어 뛰고 있는 지방의회 후보자들을 조명했다. 정치와 정당의 관성을 흔드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수단은 ‘한표’다. 35년 전 박 의원의 시의회 발언을 보며 한표가 가진 의미를 되새겨본다. 투표는 햇볕처럼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인 소독제가 아닐까.
“정보의 공개 제공은 주민의 알권리를 조례로 보장하고 주민의 행사 참여, 사회 참여를 보다 가능하게 하며 정치나 행정에 햇볕을 쐬어 곰팡이가 슬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에 인간적인 따스함을 더해주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