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선유도에 지어진 정수장
2002년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변신
석유 탱크 탈바꿈한 ‘문화비축기지’
동화 속 집 같은 도서관서 생각 쑥쑥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아이들은 어린이날을 기대하며 5월을 맞는다. 세계적인 여행지로 등극한 서울에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행지가 한두곳이 아니다. 그중 몇곳을 추려봤다.
지난 24일 오후 도착한 서울 영등포구 선유도공원. 지하철 9호선 선유도역에서 10여분 걸어가면 공원으로 이어지는 선유교가 나타난다. 한강에 유일한 보행자 전용 다리로, 서울시와 프랑스 2000년위원회가 새천년 공동 기념사업의 하나로 건설했다. 너비는 3~4m, 길이는 469m다. 프랑스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다. 여의도 야경 촬영 명소이기도 한 이곳엔 계절과 상관없이 출사족이 몰린다.
공원 들머리에서 프랑스인 2명을 만났다. 그들은 공원을 둘러보고 떠나는 참이었다. “이 공원이 특별하다는 걸 웹사이트를 통해 보고 왔어요. 산업 시설을 자연적인 환경으로 복원했다는 점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8년 전 한국에 왔다는 트리스탕이 말했다. 옆에서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는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선유도공원은 본래 정수장이었다. 서울 서남부 지역 시민들의 식수 등을 책임진 산업 시설이었다. 1978년부터 22년간 하루 40만톤 수돗물을 공급하던 이 시설은 2000년 강북정수장과 통합되면서 그해 12월 폐쇄됐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그 이상의 결과를 빚는다. 2년 뒤 이 공간은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변신한다. 정수장 콘크리트 구조물을 깡그리 없애는 게 아니라 유지하면서 숲과 공존하는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취수펌프장, 수질정화원, 정수지 콘크리트 상판 기둥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성룡 건축가와 한국 조경계의 거목 정영선 조경가가 설계하고 조성했다. 한강 최초 섬 공원이자 국내 최초 산업 시설 재활용 공원이다.
공원은 숲과 더불어 ‘이야기관’(선유도와 한강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 ‘녹색 기둥의 정원’, 수질정화원(약품침전지를 재활용한 정원), 휴식과 놀이 공간인 ‘네개의 원형 공간’, ‘시간의 정원’, 선유교 전망대 등으로 구성돼 있다. ‘녹색 기둥의 정원’은 볼수록 신비롭다.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고 남긴 기둥엔 담쟁이가 풍성하게 올라가 있다.



가장 회자되는 ‘시간의 정원’에 도착했다. 고개를 드니 하늘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였다. 정원 위에 다리가 놓인 것이다. 사람들이 다리 위를 지나다녔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를 나눴다. 봄날 오후 그들과 ‘나른한 동지’가 됐다. 직선으로 뻗은 길을 걸었다. 길은 십자형으로 교차하며 여행객을 잡아끌었다. 찌르찌르 새소리가 귀에 감겼다. 잎 사이를 타고 내려온 빛이 신발 끈에 닿았다. 신발에 빛이 그린 문양이 새겨졌다. 정원의 침묵이 말을 걸었다. ‘너는 어디에 서 있지?’라고 말이다. 갑자기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조부모, 부모와 나들이 온 아이들이 재잘거렸다. “왜 위에 다리가 있어요?” 아이는 저만치 달려가더니 다리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꽤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상상력은 그렇게 큰다.
이 정원은 과거 약품침전지가 있던 데다. 물을 뺀 침전지의 지금 주인은 느티나무, 자작나무, 모과나무 등 나무와 꽃들이다. 단언컨대 이 정원을 몇바퀴 돌면 그 어떤 고민도 해결될 것이다.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이곳의 이름은 ‘시간의 정원’이다. 정원을 빠져나오자 울창한 숲 사이에서 춤추는 이들이 보였다. 24살 동갑내기 김예영·장서연씨였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영상을 찍고 있어요. 이 공원은 (이곳저곳이) 다채로워서 (배경을) 다르게 찍기 좋아요.” 젊음도 숨 쉬는 생태공원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높이 52.5m의 작은 봉우리 선유봉이 있는 섬이었다. 중국 사신들의 필수 관광 코스였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겸재 정선의 화폭에도 담겼다. 어부, 배 건조 장인, 여의도 목장 양치기들이 살았다. 하지만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공터로 변했다. 일제는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봉우리의 돌과 흙을 채취해 홍수 방지용 둑을 쌓았다. 여의도비행장(현 여의도공원) 건설 자재로도 썼다. 봉우리는 점점 낮아져 1968년에 평평해졌다. 한국 근대 산업 시설 흔적이 남은 선유도공원의 오후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제목 ‘완벽한 날들’을 떠올리게 한다.



구로구에 있는 푸른수목원도 아이와 함께하기 좋은 생태공원이다. 2013년에 문 연 이곳은 서울시 1호 공립수목원이다. 1380여종의 자생식물이 서식한다. 저수지엔 흰뺨검둥오리, 왜가리, 물닭 등도 산다. 멸종위기 야생동물을 비롯해 생물도감에 등장하는 동물을 관찰하기 좋은 곳이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과거의 흔적에서 고양되기도 한다. 서울관광재단은 5월 여행지로 근현대 한옥을 추천한다.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선운각은 사계절이 아름다운 한옥이다. ‘미스터 션샤인’ ‘이태원 클라쓰’ ‘부부의 세계’ 등 이름난 드라마의 단골 촬영 장소다. 수도권 전철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에서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있다. 1970~8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3대 요정 밀실 정치 무대였던 선운각은 한정식집, 기도원 등을 거쳐 현재 스몰웨딩 공간이자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2000년 경매로 낙찰받은 기도원이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운영자는 임차인이다.



돌담길을 지나야 선운각 들머리에 도착한다. 지난 27일 찾은 이곳에서 북한산 자락을 휘젓는 새 소리가 들렸다. 산자락을 품은 한옥이다. 조선시대 한옥과는 또 다른 건축 미학이 도드라져 보였다. ‘근현대’를 입었다. 담에 그려진 붉은색 전통 문양이 특징이다. 한옥 건물 사이에 다리가 놓여 있다. 현대식 카페 실내를 지나 전시장 복도를 거치면 본격적인 선운각 한옥 여행이 시작된다. 한옥 나무 바닥은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삐걱삐걱. 한옥에선 익숙한 소리다. 석조등이 있는 마당과 수묵화 족자가 걸린 방 안은 과거로 순간 이동한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주거 공간은 그곳을 점유하는 인간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다. 각종 전통차와 쑥 디저트 등을 판다.

근현대 한옥의 특징을 보여주는 데는 또 있다. 서울 가회동에 있는 백인제가옥이다. 1913년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가 조선시대 한옥처럼 분리되지 않고 복도로 연결된 독특한 구조다. 사랑채 일부가 2층인 점도 특이하다. 백인제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한옥 소유자는 시대를 관통하며 달라졌다. 한상룡(1913), 한성은행(1928), 언론인 최선익(1935),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1944)를 거쳐 2009년 서울시 소유가 됐다. 2015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입장료는 없다.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사이트에서 예약하면 관람 해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1930년대 지어진 계동 배렴가옥과 고희동미술관, 최순우 옛집 등도 근현대 한옥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다. 고희동미술관은 국내 최초 서양화가로 평가받는 고희동(1886~1965) 화백이 1918년 직접 설계하고 41년간 산 한옥이다. 2004년 등록문화재 제84호가 됐다. 최순우 옛집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이자 동양미술 역사가인 최순우(1916~1984)가 거주한 한옥이다.

마포구에는 ‘문화비축기지’가 있다. 낡았지만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구조물 여러개가 포진해 있는 여행지다. 이 건물들의 본래 쓰임새는 석유 가격 폭등 대비용이었다. 1973~74년 중동 전쟁이 발발하자 석유 가격이 폭등했다. 서울시는 반복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1976년 석유 비축 탱크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2년 뒤 완공된 지름 15~38m, 높이 15m의 탱크 5개엔 6907만리터 석유가 채워졌다. 자동차 400대에 주유할 수 있는 양이었다. 1급 보안시설로 일반인 접근이 금지됐던 이곳은 2000년 12월 폐쇄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500m 떨어진 이곳이 위험시설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2013년 시민들이 참여하는 탱크 활용 공모전이 계기가 되어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춘 문화공간이 탄생했다. 2017년 완공됐다.


탱크 5개는 쓰임이 다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탱크 T1은 철제를 해체하고 유리로 벽과 지붕을 구성한 파빌리온이다. T3은 건조 당시 탱크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한 전시장이다. T4에선 각종 체험 전시가 열린다. 탱크의 거대함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탱크 자체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술품이다. 탱크 안에 들어서면 여행자는 시간을 잃어버린 방랑자가 된다. 상상하게 된다. 자신이 서 있는 데가 어디인지를 말이다.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 도시 재생의 대표 성과물로 변신한 경우다. 이 기지 뒤엔 매봉산숲길이 있다. 산책하기 좋다.
아이들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공간이 도서관이다. 최근 몇년 새 어린이 도서관이 변하고 있다. 네모난 상자 같은 모양의 건물이 아니다. 독특한 구조에 공간 미학을 얹어 상상력을 자극하고 놀이에 집중하도록 한 건물이 하나둘 생겨났다. 노원구 월계동 한내근린공원 안에 있는 ‘한내 지혜의 숲’ 도서관도 그중 하나다. 이 도서관 앞에 서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 건물인데 지붕이 위치에 따라 높이가 다르다. 출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보이는 건물의 옆 모양새도 신기하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 집 4채가 포개진 모양새다. 안에 들어서면 더 놀란다. 시옷 자 모양으로 솟은 천장이 높다. 천장이 높은 공간은 상상력을 키우는 데 더없이 유용하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한쪽 벽은 유리다. 거대한 유리창 밖에서 짙은 녹음이 일렁거리는 게 보인다. 도서관 안 통로는 정형화되지 않은 길이 이어진 듯하다가 끊긴다. 끊긴 듯하다가 이어진다. 미로 같다.


2017년 개관한 ‘한내 지혜의 숲’은 지상 1층 연면적 359㎡ 규모의 작은 도서관이다. 지역아동센터, 카페 등이 있다. 비치한 장서는 2만5천여권. 아이들의 공상을 키워주기에 맞춤한 이 건축물은 2017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 2018년 한국 건축 문화대상 우수상 등 이름난 건축상을 여러개 받았다. 이탈리아 건축 잡지가 주관하는 ‘더 플랜 어워드 2018’의 ‘공공 공간 부문’에서도 수상했다. 이 도서관의 설계자는 신창훈·장윤규 운생동 건축사사무소 대표다. 신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건축주(노원구청)가 아이들이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소통 공간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꽂이도 상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설계했다고 덧붙였다. 동화 속 양철집처럼 보이는 외관이지만 실제는 고급 철강 외장재란다. 노원구가 2025년 리모델링한 월계도서관도 ‘모두의거실’ ‘생각서재’ ‘달빛소리홀’ 등의 시설을 갖춘 상상력 극대화 어린이 도서관이다. ‘한내 지혜의 숲’에서 차로 10여분 가면 ‘불암산 힐링타운’에 도착한다. 아담한 도시 쉼터 공간이다. 이 계절을 수놓은 철쭉이 만발한 데다. 마지막 봄기운을 만끽할 장소로 더없이 맞춤하다.




서초구에 있는 ‘서초구립방배숲환경도서관’도 ‘한내 지혜의 숲’ 못지않게 주목받는 도서관이다. 2023년 6월24일 개관했다. 연면적 1632㎡,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다. 달팽이 모양의 책장, 너른 실내, 건물 가운데를 비워둔 설계 등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건물 옥상이 특이하다. ‘구름, 뜰’로 명명된 옥상은 하늘에서 보면 쉼표 모양이다. 머무는 곳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아이들의 생각이 한뼘 넘게 쑥쑥 클 장소로 여행을 가보자.
박미향 선임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