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그림 수리와 정밀모사에서
일찍부터 발군의 기량 과시
교육 통해 민화 저변 크게 넓혀
현대민화 화단의 거대 산맥 형성
인품도 시대의 사표로 손색 없어
민화계의 큰 나무가 스러지다니, 이런 슬픔의 날이 끝내 오고야 마는구나 싶다.
지난 8일 우리 곁을 떠난 원로 민화작가 파인 송규태 화백의 타계를 맞아 느끼는 소회다. 구순을 진작 넘기셨으니 하기 좋은 말로 천수를 누리셨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난 세기 승려 시인 만해 한용운이 시구로 남긴 절조처럼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진”다. 짧지 않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마치 떠나면 안 될 사람의 안타까운 요절처럼 갑작스럽고 아득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작가의 죽음을 순순히 인정하기엔 그가 한국 민화계에 남긴 발자취가 너무나 크고 무거운 탓이다.
송 화백은 한국 민화계에서 ‘거목’이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지나치지 않은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비유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현대민화의 역사는 실로 그의 붓끝에서 첫 장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1934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난 고인은 청년 시절, 당시 재야 화가였던 일봉 왕사조와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알려진 운정 정완섭 등을 사사하면서 그림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작가보다는 옛 그림의 수리와 정밀 모사 분야에서 발군의 기량을 과시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건축가이자 민화 수집가·연구자였던 조자용 선생이 세운 에밀레박물관을 필두로 국립중앙박물관, 호암미술관 등에 소장된 많은 옛 그림을 수리했다. 우리나라 국보급 서화들이 그의 탁월한 솜씨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민화와의 숙명적인 만남도 바로 이러한 옛 그림의 수리와 정밀한 모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 현대민화의 창세기에 활약한 선구자들은 여러 경로로 ‘민화의 부활’에 기여했다. 송 화백은 그런 선구자들 가운데 탁월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옛 그림의 모사를 통해 민화를 현대의 그림으로 되살리는 데 공로를 쌓았다. 우수한 초본을 바탕으로 뛰어난 필세와 화려한 설채로 옛 그림을 모사해낸 품격 있는 민화가 송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 뒤 그는 이런 작가 특유의 방법론을 화실과 평생교육원을 오가면서 활발한 교육 활동을 통해 일반에 보급했다. 그렇게 하면서 민화의 저변은 획기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현재 민화 화단을 이끄는 묵직한 원로 중진 화가들 상당수가 그의 제자들이다. 이 많은 제자가 다시 더 많은 제자를 양성하면서 ‘파인 계열’은 현대민화 화단에 거대한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한마디로 파인은 현대민화의 초석을 놓은 선구적 업적이나 현대민화 화단에 미친 영향력 모두 비견할 만한 이가 없는 거목이었다.

천의무봉한 필력도 국보급이었지만, 인자하면서 올곧은 인품 또한 한 시대의 사표로서 손색이 없었다. 앞으로도 민화계는 그와 같이 존경받고 카리스마 넘치는 원로 혹은 만인의 스승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구순을 넘어 장수하면서 초창기 선구자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민화의 봄날’도 보셨으니 할 일을 다 하고 가셨다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민화계는 ‘옛 민화의 바른 계승’과 함께 민화를 과거의 유물이 아닌 ‘우리 시대의 그림’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일이 과제로 다가온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민화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거목의 권위가 더욱 절실한 시점일지 모른다. 그분의 타계가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 많은 업적과, 그 많은 아름다운 모습들을, 아련한 아픔과 아쉬움으로 남겨놓으시고 거목은 그렇게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구나.
유정서/미술사학 박사·월간민화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