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 최형우를 보내며 정치의 미래를 묻는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5공 청산 바람이 몰아치던 1989년 3월, 여야 원내총무 협상 테이블에 민정당 김윤환과 평민당 김원기가 앉았다. 난제는 5·18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의 거취였다. 정호용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현지 지휘계통에 작전 배속돼 자신에게는 작전지휘권이 없었다며 의원직 사퇴 요구에 반발했다.

'이때만 해도 정치 낭만이'
(서울=연합뉴스) 2006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세 전직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운영과 관련해 의견을 들었다. 2015.11.22 << 연합뉴스 DB

정호용은 노태우·김윤환과 경북고 동기동창이었다. 김원기의 회고에 따르면 노태우는 원내총무 협상에 앞서 가진 김대중과의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김대중이 차기 대선에 나설 때 정호용이 군부와의 사이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좀 봐주소"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김대중은 돌아와 김원기에게 그 말을 전했다. 김윤환도 같은 빌라 위아래층에 살던 친구를 인간적으로 봐달라며 눈물까지 보였다.

그럼에도 김원기는 광주 문제를 풀지 않고는 협력할 수 없다며 노태우의 성공과 정호용의 퇴진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맞섰다. 그렇게 줄다리기 끝에 비밀각서가 탄생했다. 정호용의 공직 사퇴와 전두환·최규하의 국회 증언 등 5공 청산 조치를 추진하고 노태우의 중간평가는 유보한다는 합의였다. 당시 두 사람과 함께 4당 원내총무 협상을 이끌던 인물이 김영삼의 오른팔 최형우였다.

박정희와 김영삼의 1975년 청와대 영수회담
[출처: 김영삼 기록전시관]

1975년 5월, 박정희와 김영삼이 청와대에서 만났다. 김영삼의 회고에 따르면 전년 광복절 문세광의 흉탄에 육영수 여사를 잃은 일을 위로하자 박정희는 창밖의 새를 가리키며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다"라고 하고는 눈물을 닦았다. 박정희가 감정을 추스리자 김영삼은 유신헌법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나 욕심 없다. 집사람은 공산당에 총 맞아 죽어 절간같이 된 이런 곳에서 죽기 살기로 오래 할 생각 없다"며 민주주의 할 테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 대통령 퇴진 의사가 알려지면 국정 운영이 어려워진다며 비밀을 당부했고, 김영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담 후 '차기 밀약설'이 불거지며 '사꾸라'로 몰린 김영삼은 1979년 국회에서 제명 처분을 당하고 박정희가 숨지고 나서도 한동안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내용을 공유한 최형우 등 최측근들도 함구했다.

DJ 목포 유세 지원 나선 최형우
(서울=연합뉴스) 6·29 선언으로 정계 복귀한 김대중 민주당 고문 내외가 1987년 9월 9일 무궤차를 타고 환영하는 목포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왼편에 권노갑, 최형우, 김옥두 전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 연합뉴스 DB >> 2009.8.18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최형우가 떠났다. 그의 장례위원장에는 권노갑이 이름을 올렸다. 독재에 함께 맞서다 대권을 놓고 갈라져 치열하게 싸운 상도동과 동교동의 두 가신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비자금 의혹 수사를 유보한 김영삼,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안긴 전두환을 용서하고 집권 뒤 청와대에서 마주 앉은 김대중의 정치 뒤편을 지켰던 이들이기도 하다.

최형우의 마지막 길을 권노갑이 배웅하는 모습에 오늘의 삭막한 정치가 겹쳐진다. 그 시절을 낭만으로만 미화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대화와 타협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정치가 막장을 넘어섰다. 당면한 숙제를 풀고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과거를 끄집어내 우려먹는 데 열심이고, 지지층은 상대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내는 정치꾼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낸다.

YS·DJ의 분신 최형우와 권노갑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20일 오전 서울 동작구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김영삼-상도동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오른쪽)이 권노갑 민주평화당 상임고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19.6.20 kane@yna.co.kr

신문과 방송에 '재래식' 딱지를 붙이며 막강한 여론 권력이 된 유튜브에는 상대를 몰아붙이고 망신주는 쇼츠가 넘쳐난다. 금배지를 지키려는 정치인들은 타협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대신 강성 당원의 분노와 적개심을 부추긴다. 당원민주주의라는 간판 아래 이견을 배신으로 몰고 타협을 응징하는 파쇼 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옛 밀실 정치의 효능감을 들먹이는 게 아니다. 아무리 싸워도 나라를 위해 다시 마주 앉아 양보와 타협을 모색하던 정치가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또 하나의 '옛날 정치인'을 보내며 묻게 된다. 우리는 언제쯤 이 야만의 정치를 끝낼 수 있을까.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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