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 [정치의 과잉, 사라진 민생](下)
'기업하기 좋은 나라' 외쳤지만…규제완화 입법 후순위

이재명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규제 합리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기업 부담 완화와 투자 촉진을 위해 추진해온 주요 입법 과제 상당수는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배임죄 개편과 규제샌드박스 통합, 대형마트 새벽배송 허용 등이 소관 상임위원회에 머물러 있고, 메가특구법의 노동 규제 특례도 노사정 논의가 현재 진행 중이다. 규제혁신을 강조해온 정부·여당의 기조에 비해 실제 입법 속도는 더디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국회 등에 따르면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경제형벌 합리화와 신산업 규제 완화 등을 주요 정책 과제로 추진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월 노동절 기념사에서 "노동 존중 사회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며 노동과 기업의 상생을 강조했다. 정부·여당은 지난해 9월 110개 형벌 규정을 손보는 1차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12월에는 331개 규정을 대상으로 2차 방안을 내놨다. 올해 4월에는 약 230개 추가 과제를 담은 3차 추진 방안을 국무회의에 보고했다.
대표적인 기업 부담 완화 과제인 배임죄 개편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법무부는 지난 상반기 배임죄 폐지를 기본 방향으로 대체 입법을 추진해 기업인의 경영상 부담을 줄이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김승원 민주당 의원이 지난 7월 8일 발의한 형법 개정안은 합리적인 정보에 기초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내린 의사결정은 배임죄 적용을 배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다음 날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뒤 여전히 계류 중이다. 같은 날 발의된 상법 개정안도 상법상 특별배임죄를 삭제하는 내용으로 법사위에 머물러 있다.
대형마트 새벽배송 허용도 답보 상태다. 김동아 민주당 의원은 지난 2월 대형마트와 준대규모점포가 의무휴업일이나 영업제한 시간에도 온라인 주문·배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온라인 플랫폼과 대형마트 간 규제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취지다. 법안은 지난 5월 19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상정돼 법안소위로 넘겨졌지만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당정 역시 온라인 배송 규제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지역 단위로 각종 규제를 묶어 완화하는 '메가특구'도 입법이 관건이다. 청와대는 지난 4월 광역·초광역 단위 메가특구를 도입하고 인허가 절차 단축 등 규제특례를 적용하기 위해 연내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여당도 정기국회 내 처리를 목표로 했지만 주52시간제 적용 완화와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등 노동특례를 둘러싼 이견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4일에도 노사정이 4차 실무협의를 진행했으며 오는 20일 추가 회의를 열기로 했다.
정부·여당은 국정감사가 끝나는 대로 주요 규제완화 과제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한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정책위 관계자는 "정부와 청와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고 관련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며 "당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부분이 있고 국감 기간에는 당정협의를 잡기 어려운 만큼 국감이 끝나면 정리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실용' 내세운 李정부…경제 로드맵·컨트롤타워 부재
대미 관세 협상과 메가특구 프로젝트 등 개별 현안에 대한 정부의 속도전이 일부 성과를 거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관가와 경제계에서는 출범 초기 국정과제로 제시한 주요 과제들의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있다. 대표적인 과제가 '잠재성장률 3% 복원'이다. 저출생·고령화와 생산성 둔화로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1%대 후반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잠재성장률 회복은 구조적 저성장의 고리를 끊기 위한 핵심 목표다.
경제 관료 출신의 한 정책 전문가는 18일 "집권 1년 차에 부동산과 주식 등 당면 현안을 점검하고 기초를 다졌다면, 이제는 잠재성장 능력을 확충하고 양극화를 구조적으로 해소할 2단계 마스터플랜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인구 위기 대응과 생산성 혁신,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내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등 펀더멘털(기초체력)을 다지는 작업이 절실한데 지금은 재정 재분배에만 매달리는 모양새"라며 "시장 소득을 높일 양질의 민간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정부의 이전지출을 통한 양극화 완화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내세운 '실용'이 뚜렷한 거시정책 철학과 맞물리지 못하면서 정책 현장의 혼선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친기업 기조와 규제 강화 사이의 충돌이다. 투자 유치를 위해 기업 지원책을 내놓으면서도 특정 산업에 규제를 강화하고 시장 가격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정조사를 벌이는 등 정책 방향이 엇갈린다는 지적이다.
개별 정책 간 유기적인 조율이 부족한 점도 시장 불안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부동산·주식·농지·재정 정책이 개별적으로 추진되는 가운데 정부의 확장재정 기조와 한국은행의 통화긴축이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전직 고위 관료는 "정책 간 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다 보니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에 부담을 느낀 한은이 홀로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혼선의 배경에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경제 컨트롤타워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정경제부가 장기적인 거시경제 청사진을 주도적으로 제시하기보다 청와대의 개별 지침을 집행하는 실무 조직에 머물면서 거시정책의 무게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직 고위 관료는 "부총리나 장관이 실·국장과 핵심 과장에 대한 실질적인 인사 재량권조차 갖지 못하고, 국무회의를 통해 세부 지침까지 일일이 하달되는 구조에서는 관료 조직이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다"며 "경제 컨트롤타워의 권한과 책임을 재경부에 온전히 맡겨야 실질적인 정책 실행 능력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미래대응기금 논란도 사례로 마찬가지다. 그는 "국정 최고책임자가 큰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을 넘어 세부 사업까지 직접 지시하는 '만기친람'식 접근을 하다 보니 부처 장관이 뒤늦게 수습에 나서는 등 정책 혼선이 발생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컨트롤타워의 주체를 정하는 것보다 구조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제언도 나온다. 한 정책 전문가는 "컨트롤타워가 재경부든 총리실이든 청와대든 주체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라며 "단기적인 경기 방어를 넘어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 능력을 끌어올릴 구조개혁을 임기 내내 긴 호흡으로 일관되게 추진할 범정부 체계를 조속히 복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업친화 실용주의, 실제 정책은..."…재계, 노동·규제개혁에 불만
재계는 정부와 국회가 기업 활동에 유연한 실용주의 경제 정책 구호를 외치면서도 정작 정책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업들이 우려하는 노동 편향 정책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데다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규제개혁 요구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으면서 경영 환경이 전반적으로 악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꼽는 대표적인 사례는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 시행과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법정 정년 연장이다. 재계는 노란봉투법 입법 추진 단계부터 노조의 과도한 교섭 요구 등 부작용을 우려해 여러 대안을 제시했지만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법 시행 이후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고, 노동위원회의 사용자성 판단을 둘러싼 노사 간 갈등이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의 기업 대상 설문조사에서는 원청 사용자성 관련 판정이 '법률 및 고용노동부 해석지침에 맞게 이뤄지고 있다'는 응답은 27.4%에 그쳤다.
정년 연장을 둘러싼 갈등도 이어지고 있다. 재계는 청년 고용 위축 등 부작용을 고려해 재고용 활성화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정부·여당은 오히려 입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정년 연장 법안은 연내 꼭 처리돼야 한다"며 "국회 태스크포스(TF) 등을 통해 오랜 기간 논의가 숙성된 만큼 결단만 남았다고 판단되면 정부안을 조속히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반도체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업이 어려운 상황인데 정부의 친노동 정책으로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정부·국회가 특히 노동 이슈에 대해서는 기업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규제개혁 역시 재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규제합리화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는 등 의욕을 보였지만 구체적인 성과가 더딘 데다 재계의 요구도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다.
기업들이 특히 아쉬움을 나타내는 대목은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를 위한 메가특구 특별법의 노동 특례 논의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기업 생산성과 노동자 건강권 보호 간 조화'를 강조하면서 특례 도입이 결국 흐지부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 활동에 꼭 필요한 노동정책이 정치권의 해묵은 이념 공방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걱정이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사회적 대화도 중요하지만 노동계가 강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 언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며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은 사업 추진 속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만큼 최소한 정부가 내부 검토해온 일정에 맞춰 입법이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이버 도박장 같다" 순식간에 '돈 삭제'…국정지지율도 흔들
30대 직장인 A씨는 지난 4월 코스피 상승세가 이어지자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에 5000만원을 투자했다. A씨는 "다들 코스피, 반도체 이야기를 하니 나만 안 들어가면 바보가 될 것 같아 집중적으로 샀다"고 말했다.
최근 증시가 급락하면서 A씨의 투자 손실도 커졌다. 15일 기준 손실액은 약 1000만원이다. A씨는 주식 앱도 삭제했다고 했다. 그는 "지금 팔면 손실이 확정되는 셈이라 뺄 수도 없다"며 "여기서 더 떨어지면 정말 패닉일 것 같다"고 말했다.
반도체 호황과 증시 상승 기대에 투자에 나섰던 개인투자자들이 최근 주가 하락으로 손실을 입고 있다. 부동산에 이어 주식시장까지 불안한 흐름을 보이면서 투자자들의 불안도 커지는 모습이다.
30대 직장인 B씨도 이달 초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SK하이닉스에 1000만원을 투자했다가 현재 약 200만원의 손실을 보고 있다. B씨는 "SK하이닉스가 160만원대일 때 저점이라고 생각해 들어갔다"며 "그런데 주가가 120만원대까지 떨어지니 멘붕이다. 물타기를 하고 싶어도 당장 투입할 자금이 없다"고 말했다.
손실이 커지면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B씨는 "이재명 정부가 부동산 안정화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약속했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한 것 아니냐"며 "하루에도 주식시장이 몇 퍼센트씩 요동치는 걸 보면 (주식시장이) 근본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증시 불안이 개인투자자들의 손실과 정책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 평가도 부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6~8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35%,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47%로 나타났다. 긍정 평가는 지난 3월 58%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를 이어갔으며, 이번 조사에서 부정 평가와의 격차가 12%포인트로 벌어졌다.
증시 불안이 지속될 경우 정부의 국정 운영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식이 가계 자산과 노후 대비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만큼,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이 커지면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초기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일을 잘한다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국 말만 앞섰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월세 급등에 증시 하락까지 겹치면 정부가 자신 있게 내놓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이재명 정부가 증시 부양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해온 만큼 최근 증시 급락은 국정 운영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며 "특히 주식 투자 비중이 높은 40~50대가 손실을 입었다면 이들의 정부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엄 소장은 "최근에는 경제·민생 분야에 대한 평가도 예전만큼 긍정적이지 않다"며 "대통령이 경제와 민생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인식을 줄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의 성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주가 하락의 책임을 정부에만 돌리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최근 주식 투자로 300만원의 손실을 본 60대 C씨는 "주식은 결국 투자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장기적으로 보면 연말까지 국내 증시가 회복될 수도 있는데, 모든 책임을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갤럽 조사는 무작위 추출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이용해 전화조사원 인터뷰 방식으로 진행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접촉률은 42.3%, 응답률은 9.7%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