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 [정치의 과잉, 사라진 민생](上)
정치에 가려진 민생...동력잃은 경제정책 입법

집권여당의 정치 과잉 속에 민생이 뒷전으로 밀리면서 성장 온기 확산과 국민 체감 경제 회복을 구호로 내건 이재명 정부의 정책 추진 동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물가와 주거비 부담 증가, 증시 불안 등으로 민생 현안이 산적한데도 검찰·사법개혁 논란과 여권 내 계파 갈등 등 정치 현안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시급한 경제·민생 의제가 가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 집권 1년은 실용주의 경제정책과 여당의 입법 지원이 맞물려 돌아간 기간이었다. 상법 개정으로 자본시장 개혁의 첫 발을 뗐고,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추진됐다. 한미 관세협상 타결과 대미투자 후속 협상 등 대외 경제 현안에도 적절히 대응했다. 정부가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 여당이 입법으로 뒷받침하는 구도가 작동하면서 경제 회복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전후해 여권 내 계파 갈등과 검찰개혁, 대법관 제청권 논란, 인사 책임론 등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경제 의제의 존재감이 약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 정책을 입법으로 뒷받침하고 민생 현안을 해결해야 할 여당의 관심과 역량이 정치적 이슈에 집중되면서 당정 간 정책 공조도 초기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증시 불안은 정책 대응과 시장 신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지난 7월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를 둘러싸고 정책 혼선이 불거진 데 이어, 최근에는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리밸런싱 유예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판단을 놓고 시장 안정과 운용 독립성, 정책 결정의 투명성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증시 변동을 정부 정책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본시장 선진화를 내건 정부가 시장 신뢰를 지키고 개인투자자의 불안을 줄일 정책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는 요구는 커지고 있다.
기업 현장에서도 정부의 메시지와 실제 정책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 규제 합리화를 강조하지만, 배임죄 적용의 불확실성과 노란봉투법 시행, 정년 연장 논의 등을 둘러싼 기업들의 우려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실용적 경제 노선을 표방하고 있으나 여당의 입법 결과물이 기업의 규제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인식이 여전하다. 상법 개정 등 자본시장 개혁 성과도 후속 제도 개선으로 이어가야 하지만 추진 동력이 약해지면서 개혁 기조가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 전직 경제 관료는 "정치 현안에 경제 의제가 가려지면 정부 출범 초기의 성과가 지속적인 신뢰로 이어지기 어렵다"며 "여당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입법으로 뒷받침하고 자본시장 개혁과 산업 투자, 규제 개선, 민생 안정을 아우르는 중장기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적 대립이 경제정책 추진을 계속 제약한다면 정부가 내세운 실용도 구호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코스피 -40% 와르르" 개미 피눈물 흘릴 때...정치권 딴 곳 봤다
코스피가 고점 대비 40% 가까이 하락하는 동안 국회의 관심은 정치 현안에 쏠려 있었다. 여야는 국회 후반기 원 구성부터 검찰개혁과 대법관 후보자 제청 문제까지 사안마다 충돌했다. 자본시장 선진화와 주가 상승을 경제정책의 핵심 성과로 내세웠던 정부·여당은 정작 시장이 급락하는 국면에서 위험 관리와 투자자 보호에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의문을 남겼다. 증시 하락의 원인을 정치권에만 돌릴 수는 없지만 시장이 상승할 때와 하락할 때 정부·여당의 정책 대응이 달라진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18일 정치권에 따르면 코스피가 사상 최고점을 기록한 지난 6월 22일, 정치권의 최대 현안은 국회 후반기 원 구성이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법제사법위원장 배분을 놓고 여섯 차례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정부·여당은 주가 상승을 현 정부의 가장 큰 경제 성과로 강조하기도 했다. 반면 시장 과열 가능성과 급격한 변동 가능성에 대한 경고음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조정 국면에 대비한 투자자 보호와 시장 안정 대책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 했다는 뜻이다.
7월 들어 증시 하락세가 본격화했지만 정치권의 관심은 검찰개혁으로 기울었다. 후반기 원 구성이 마무리되자 법사위를 가동한 민주당은 보완수사권 폐지 문제를 추진했고, 관련 법안은 각계의 반대와 논란 속에 한 달 만에 본회의에서 처리됐다. 시장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자본시장 현안을 둘러싼 여야 논의는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8~9월에는 사법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정치권의 전면에 섰다. 지난 8월 18일 조희대 대법원장이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제청하자 정부·여당과 대법원 사이의 대립이 부각됐다. 여권 강경파에선 조 대법원장 탄핵 주장이 나왔고, 야당은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 요구가 부당하다고 맞섰다. 사법부 인사를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면서 자본시장 제도 개선과 투자자 보호 등 경제 현안은 정치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부동산 세제개편도 정치권의 관심을 분산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 8월 3일 세제개편안 초안이 발표된 뒤 정부와 국회는 부동산 세제와 주거 정책을 둘러싼 논쟁에 집중했다. 부동산 안정 역시 중요한 민생 과제지만 관련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후속 입법과 제도 개선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스피는 지난 9월 30일 6838.04로 마감한 뒤 10월 15일 5554.22까지 떨어졌다. 보름 만에 하락률이 18.77%에 달했다.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주요국 금리 인상 우려와 인공지능(AI)·반도체 업종의 투자 및 수익 전망을 둘러싼 불확실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외 변수와 시장 자체의 조정 요인이 컸던 만큼 주가 하락을 정부·여당의 책임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주가 상승을 정책 성과로 내세웠던 여당이라면 하락 위험에 대비하는 일에도 일관된 관심을 기울였어야 한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시장이 흔들릴수록 정책의 예측 가능성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투자자 보호와 기업가치 제고, 자본시장 제도 개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권 관계자는 "주식이 본격적인 하락세에 접어들기 전부터 정부와 여당이 투자자 보호와 기업가치 제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도 정치 현안에 지나치게 골몰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상법 3차례 고쳤지만…자본시장 선진화 입법은 '제자리'
상법 개정만 놓고 보면 성과는 뚜렷하다. 지난해 7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는 1차 개정이 이뤄졌고, 같은 해 9월에는 대규모 상장사의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고 감사위원 분리선출 인원을 늘리는 2차 개정이 뒤따랐다.
지난 2월에는 기업의 자기주식 소각을 원칙적으로 의무화하는 3차 개정까지 마무리됐다. 기업들의 우려에도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와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해 온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컸다. 소액주주 권익을 보호하고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자본시장법 개정에서도 일부 진전이 있었다. 국회는 지난 8월 기업 합병·분할 과정에서 공정가액을 적용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합병가액의 적정성에 대한 이사회 검토와 외부 평가를 강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후속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다. 대표적인 법안이 의무공개매수제 도입이다. 상장사 경영권이 이전될 때 지배주주뿐 아니라 일반주주에게도 경영권 프리미엄을 공유할 기회를 보장하자는 취지다. 자본시장법 개정이 필요한 이 법안은 지난달 정무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하고 법제사법위원회 심사까지 마쳤지만, 본회의 상정이 보류됐다.
주가누르기방지법 관련 입법도 제자리걸음이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관련 내용을 구체화해 법안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소관 상임위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주가가 장기간 낮은 수준에 머무는 기업의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를 의무화하는 법안도 국회에 발의됐으나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2개 사업연도 연속 1배 미만인 상장기업에 자사주 취득·소각이나 배당 계획 등을 공시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물적분할 이후 자회사를 상장하면서 모회사 주주가 소외되는 이른바 '쪼개기 상장' 문제를 보완하는 법안도 정무위에 계류돼 있다. 기관투자자의 5% 대량보유 보고 의무 부담을 완화하는 법안 역시 지난 7일 발의됐지만 상임위 통과와 본회의 처리까지 갈 길이 멀다.
증시 급락의 원인을 입법 지연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국제 정세와 금리, 산업별 실적 전망 등 다양한 변수가 주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만 투자자 신뢰를 높이고 기업의 주주환원과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할 제도적 기반이 시장의 장기적인 경쟁력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입법 공백이 길어질수록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커질 수밖에 없다.
여권 관계자는 "몇 차례 법을 개정했다는 식으로 성과를 홍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며 "자본시장 선진화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고 남은 과제도 최대한 빨리 매듭짓도록 국회가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