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달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치솟는 기름값에 다급해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결을 서두르면서 종전 협상의 무게추가 러시아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가 안정을 위해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완화하는 한편,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를 압박할 핵심 수단인 정유시설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틈을 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 미·중·러 3자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협상에서 ‘큰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의사가 배제된 채 러시아에 유리한 합의가 추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의 불균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현지시각)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산 경유의 국제시장 공급 확대에 합의한 데 이어, 16일에는 지난달 의회가 초당적으로 통과시킨 대러시아 제재법의 핵심 조항의 적용을 유예했다. 반면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 중단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정책 변화의 배경에는 중간선거를 앞둔 유가 부담이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 12일 기준 전국 평균 경유 가격은 갤런당 6.18달러로 1년 전보다 약 69% 올랐다. 농업과 화물운송 등에 필수적인 경유 가격 급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 이탈을 부르고 있다.
미국의 요구는 우크라이나의 협상력도 약화하고 있다.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장거리 공격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하는 주요 수단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정유시설 공격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 공격을 멈추거나, 미국이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을 추가 공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사·정보 지원을 둘러싼 갈등도 심화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 따르면 미국이 러시아 탄도미사일 발사와 관련한 사전 경보 정보의 공유를 일시 중단했다가 재개했으며, 우크라이나군이 사용하는 스타링크의 군사용 위성통신 서비스 ‘스타실드’도 무인기 등이 시속 161㎞(100마일)를 넘어서면 통신이 제한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공개된 블룸버그통신·엔비시(NBC) 인터뷰에서 미국의 패트리엇 요격미사일 공급이 바이든 행정부 시절의 4분의 1(월 12기)로 줄어든 점과 정보·통신 제한을 거론하며 이를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압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위성통신 제한이 “미국 정부의 메시지”에 따른 것이라며, 미국이 러시아 편에 서는 것은 “역사적 실수이자 비극”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정보 제공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거나 스타실드의 속도 제한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는 이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이 세계 경유 시장을 해치고 미국 농민과 기업에 고통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저렴한 경유를 공급하고 있다며 두둔하는 한편,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서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으며, 아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활용해 협상의 틀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은 관계자들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지난 9일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까지 참여하는 3자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다음달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를 계기로 개최하는 방안이다. 크렘린궁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도 3자 회동 가능성을 논의 중이라고 확인했다.
이 구상의 핵심은 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다는 점이다. 관련 논의를 보고받은 전직 러시아 정보기관 관계자는 푸틴 대통령이 강대국끼리 세력권을 나누는 ‘제2의 얄타회담’을 구상하는 것 같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전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회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개최 여부도 불확실하다.
이런 갈등 속에서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인 스티브 윗코프,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40분간 통화하며 추가 협상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선거 기간에는 정치가 매우 공격적”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한 압박이 중간선거를 앞둔 일시적 현상에 그치고 선거 이후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원철 특파원 won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