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디거'에는 잊히지 않는 청문회 장면이 나온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린란드 석유 시추 현장에서 지하 메탄가스가 누출돼 대형 폭발이 일어난다. 그 여파로 거대한 빙하 조각이 떨어져 나온다. 빙하는 북유럽을 덮쳐 수십만 명이 죽거나 다친다. 상황의 위험성을 보고 받고도 시추 작업을 강행한 석유 재벌 '디거(톰 크루즈)'가 국제 청문회장에 선다. 각국 정상들은 연단에 선 디거에게 야유를 쏟아낸다.
청문회장에서 디거가 꺼내든 건 뜻밖에도 주주명부다. "여기 내가 고른 주주 목록입니다. 대통령들, 총리들, 왕들." 그는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각국 정상들 역시 자신의 회사 주주라고, 자신은 기업가로서 당신들의 이익을 위해 달려왔을 뿐이라고 되받아친다.
디거는 한술 더 떠,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리는 북극의 빙하를 '새로운 에너지 개발의 기회'라고 선언한다. 그는 "러시아와 중국은 이미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며 위기의식을 자극한다. 어느새 청문회는 환경 재앙의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국가 간 경쟁을 논하는 자리로 바뀐다.
마켓부 기자로 일하며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기업은 국가대표, 주주는 열렬한 응원단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내 기업이 해외 경쟁사를 제치고 대형 수주를 따냈다는 기사를 쓰며 환호했다. 주식시장을 취재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감각이다.
영화 속 디거가 주주명부를 흔드는 모습이 몇 주째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그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세상을 '주주'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중동에서 분쟁이 격화하면 방산주가 상승했다고, 지구온난화로 유럽의 에어컨 수요가 늘면서 냉방주가 올랐다고 썼다. 거짓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주가를 움직인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어떤 비극인지 매번 고민했던 것은 아니었다.
디거의 논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켓부 기자는 어떻게 일해야 할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몇 가지 다짐해볼 뿐이다. 누군가의 비극을 '호재'라고 쓰는 일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주가가 오른다고 세상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고.
참고로 디거의 '뻔뻔한' 연설은 성공했다. 연설 후 청문회 뉴스를 보던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월스트리트가 좋아하고 있어. 지금도 주가가 폭등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