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이주' 수난사 딛고 한·중앙아 잇는 전략적 자산 대두
1% 미만 소수민족이지만 주류 사회서 정치·경제적 영향력 막강
"귀환동포 비자 간소화 등 실질적 통합 정책 절실"

(알마티=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카자흐스탄 정부가 사운을 건 혁신 신도시 '알라타우 시티' 개발에 일부 참여하는 채유리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장 겸 카스피안그룹 회장이 지난 6월 20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사무실에서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26.9.4 raphael@yna.co.kr
(알마티[카자흐스탄]·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연합뉴스) 박현수 성도현 기자 = 1937년 연해주에서 차디찬 붉은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낯선 황무지에 내던져졌던 이들이 있다.
구소련 시절 스탈린 정권은 극동 지역에서 일본의 군사 위협이 높아지자 고려인들의 간첩 행위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1937년 9월부터 12월까지 17만 명이 넘는 고려인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이주시켰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갈대와 돌뿐인 땅에 버려진 이들은 매서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맨손으로 언 땅을 일구고 벼를 심으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눈물과 한으로 얼룩졌던 중앙아시아 이주 1세대의 궤적은 어느덧 90년의 세월을 거치며 유라시아 문명 교차로를 밝히는 빛으로 탈바꿈했다.
오는 16~17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1차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와 2027년 고려인 강제이주 90주년을 앞두고,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에서 맹활약하는 고려인 동포들의 생생한 모습을 취재했다.
90년간 뿌리내린 고려인 사회는 과거의 아픔을 넘어, 한국과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강력하고 실질적인 '전략적 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 5개국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31만명(2025 재외동포현황)으로 추산된다. 현지 전체 인구 대비 1%도 채 되지 않는 소수이지만, 이들이 주류 사회에서 발휘하는 정치·경제적 영향력은 막강하다.

(알마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카자흐스탄 동포사회 이끄는 고려인협회 임원들. 왼쪽부터 강 게오르기 교수, 리류보비 예술감독, 김로만 전 하원의원, 채알렉산드라 부회장, 김콘스탄틴 대표. 2026.9.4 phyeonsoo@yna.co.kr
◇ 알라타우 시티와 K-파크… 디지털·미래 도시 이끄는 고려인
카자흐스탄 인구 약 2천만 명 중 고려인은 12만 명으로 전체의 0.6%에 불과하다. 그러나 포브스 등 경제 전문지가 선정하는 국가 자산 순위 상위 50대 재벌에 최대 8명의 고려인이 이름을 올릴 정도로 이들의 경제적 장악력은 압도적이다.
알마티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공화국 궁전, 카자흐스탄 호텔 등 대형 공공 건축물도 고려인 건축가와 엔지니어들이 설계를 주도하는 등 국가 인프라 구축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채유리 카스피안그룹 회장은 카자흐스탄 정부가 사운을 건 혁신 신도시 '알라타우 시티'(Alatau City) 개발의 선봉에 섰다. 문드미트리 전 디지털혁신부 차관은 슈퍼컴퓨터 최초 도입과 120개 정부 데이터베이스(DB) 통합을 이끌며 양국 디지털 혁신에 앞장서고 있다.
카자흐스탄 아이스크림 시장을 평정한 신라인(Shin-Line) 그룹의 신안드레이 회장은 특유의 근면함을 무기로 한국 BGF리테일(CU편의점), 롯데글로벌로지스와 손잡고 대륙의 소비 지형을 바꾸고 있다.

(알마티=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카자흐스탄 아이스크림 시장을 평정한 고려인 기업가인 신 안드레이 신라인그룹 회장이 지난 6월 20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한 호텔에서 양국 관계의 미래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2026.9.4 raphael@yna.co.kr
이 밖에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를 이끄는 인물로 김로만 전 카자흐스탄 하원의원, 강게오르기 전 카자흐스탄 국립사범대 역사학부 교수, 리류보비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 예술감독, 채알렉산드라 고려인협회 부회장, 조엘레나 알마티 시의원, 김콘스탄틴 고려일보 대표 등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인협회는 알라타우 시티 내 주요 첨단 산업 및 상업 소규모 프로젝트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 알라타우 시티 내 글로벌 정보기술(IT) 개발자들과 스타트업들이 한데 모이는 'K-파크'를 가장 먼저 구축해 운영할 계획이다.
내년 창립 95주년을 앞둔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은 한반도 안팎에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온 한민족 공연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지금도 연간 65개의 공연을 올리며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강제 이주로 카자흐스탄 끄질오르다를 거쳐 알마티에 정착하기까지, 숱한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민족의 언어와 문화유산을 지켜낸 거점이었다.

(알마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카자흐스탄 국립 아카데미 고려극장 전경. 지구촌 최장수 한민족 극단으로 2027년 창립 95주년을 맞는다. 2026.9.4 phyeonsoo@yna.co.kr
이와 관련, 예브게니 코체토프 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차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카자흐스탄 정부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운영비 100%를 지원하는 극장"이라며 2026년에도 5억5천만 텡게(약 16억6천만원)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카자흐스탄에 있는 약 12만 명의 고려인은 양국을 연결하는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의 K-콘텐츠와 한류는 훌륭한 롤모델"이라고 강조했다.

(아스타나=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예브게니 코체토프 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차관이 지난 6월 23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의 문화정보부 건물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6.9.4 raphael@yna.co.kr
아브짤 누켄오비치 누켄오브 알마티시 부시장도 지난 7월 17일 연합뉴스와 만나 "카자흐스탄 사람이든, 고려인이든, 러시아인이든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면서 "고려극장을 지키는 일은 우리에게도 큰 책임"이라며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지원 의지를 강조했다.

(알마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아브짤 누켄오비치 누켄오브 알마티시 부시장이 지난 7월 17일 알마티시 청사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6. 9.4. phyeonsoo@yna.co.kr
◇ 우즈베크 경제·정치계 이끄는 차세대 동포들…역사박물관 건립 박차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은 약 18만 명으로, 중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은 동포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 우즈베크 내 고려인들의 활약은 정치,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눈부시다.
현직 3선 국회의원으로 고려문화협회를 이끄는 박 빅토르 회장, 유아일반교육부 장관을 지낸 신아그리피나 부천대 총장, 재정경제부 산하 국가프로젝트관리청 수장인 리드미트리 청장, 남빅토르 전 러시아 국립 헤르젠사범대 타슈켄트캠퍼스 총장, 허선행 세종학당장 등이 현재 주류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다.
떠오르는 차세대 인물로는 우즈베키스탄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는 이 이고르 의원을 비롯해, 고려인 비즈니스 클럽을 이끌며 경제계를 주도하는 리 야니스 회장 등을 꼽을 수 있다.

(타슈켄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박빅토르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장이 7월 7일 타슈켄트에 있는 고려문화협회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6.9.4 phyeonsoo@yna.co.kr
리 회장은 한식당을 인수해 '고려인'으로 상호를 바꾸고, 단순한 상업적 식당을 넘어 고려인 이주 역사 자료와 희귀 사진들을 체계적으로 전시하는 '민족 문화 역사 교육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는 오는 2027년 고려인 강제 이주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형 역사 보존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재외동포청이 2027년 예산에 반영해 한국문화예술의 집 부지 내에 고려인 역사박물관을 신축할 계획이다.
이 박물관은 160년 고려인 수난사와 영광의 기록을 보존하는 동시에, 우즈베키스탄과 대한민국 간의 우호 협력을 상징하는 핵심 문화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타슈켄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리 야니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비즈니스 클럽 회장이 7월 6일 타슈켄트에 있는 한식당 '고려인'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6.9.2 phyeonsoo@yna.co.kr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민족 정체성 보존과 차세대 문화 교육을 향한 동포 사회의 끈끈한 열정이 돋보인다.
고려인협회는 1989년 10월 출범했으며, 2005년 산 보리스 제4대 회장이 사재를 털어 부지와 건물을 기증해 '고려인의 집'이 마련됐다.
이곳에서는 2025년 취임한 제8대 김인센 회장 체제 아래 5세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맞춤형 한국어 교육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지빅토리야 협회 부회장은 "K팝과 댄스는 물론 전통 악기 연주팀을 꾸려 주요 행사 때마다 수준 높은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비슈케크=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지빅토리야 키르기스스탄 고려인협회 부회장이 7월 10일 비슈케크 외곽에 있는 고려인협회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6.9.4 phyeonsoo@yna.co.kr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타지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동포 사회의 저력도 만만치 않다. 타지키스탄 내 고려인은 150여명 불과하지만, 현지 80여개 다민족 중 이들의 사회적 위상과 자부심만큼은 상당하다.
1990년대 최대 1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타지키스탄 내전'의 참상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 동포 사회를 지킨 김 빅토르 타지키스탄 고려인협회장은 "우리는 구소련 지역 전체를 뭉뚱그린 '고려사람'이 아닌, 험준한 산악국가에서 내전을 버티고 살아남은 '타지키스탄 코리안'이라는 독자적 정체성과 긍지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와 관련해 "타지키스탄은 중앙아시아 내 한국의 이니셔티브에 강력한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핵심 지렛대"라며 "전략적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의 확대와 양국 간 밀착 협력의 파괴력을 절대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외부 접근이 쉽지 않은 투르크메니스탄에서도 동포들의 활약은 현재진행형이다.
척박하고 폐쇄적인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도 현지 유통과 무역의 활로를 개척해 낸 사업가 백 타티야나는 양국 간 경제 교류의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사이버 보안·IT 전문 기업을 운영하며, 현지 기업인들과 한국 기업 간 컨설팅 사업도 한다.
그의 사례처럼 현지 네트워크와 실전 감각을 갖춘 고려인 기업인들은 통역이나 중개를 넘어, 합작 투자를 끌어내고 한국의 선진 기술을 현지에 이식하는 등 '민간 경제 외교관'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타슈켄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외곽에 있는 일명 '김병화 마을' 거주 고려인들이 김병화 박물관과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하고 있다. 2026.9.2 phyeonsoo@yna.co.kr
◇ 역사적 책임감 바탕으로 포용 정책 절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동포들이 거둔 이 같은 화려한 성공과 국가적 기여의 이면에는, 모국인 대한민국 정부와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아있다.
화려한 성공을 거둔 일부 동포들과 달리, 초기 정착 및 사회 변혁 과정에서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인 노년층 고려인들의 삶은 고단하다. 현지 및 모국에서의 노후 복지 혜택 부재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타슈켄트 외곽에는 고려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일명 '김병화 마을'이 있다. 김병화(1905∼1974)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과 황무지를 개간해 소련의 대표적인 집단농장으로 일군 지도자다.
농장 수익으로 발전소와 학교, 병원 등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한 공로로 소련 최고 영예인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두 차례나 받았다.
김병화 마을에는 한때 2천 명이 넘는 고려인이 거주했으나 이제 300명도 채 남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러시아와 한국 등으로 떠나면서 고령화도 심화됐다.
이 때문에 주민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김병화 박물관이 사립이다 보니 전기세 등 관리비를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서 꾸려가는 실정이다. 게다가 마을 인근에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묘역도 관리할 사람이 없어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타슈켄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외곽에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 묘역 정문 모습. 내부는 잡초가 우거져 있어 효율적인 관리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6.9.2 phyeonsoo@yna.co.kr
타슈켄트 외곽에 자리한 아리랑요양원은 부양가족 없이 홀로 살아가는 고려인 어르신들의 노후를 보듬는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고려인 전용 요양시설로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고령과 질병으로 혼자 생활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숙식과 건강관리, 여가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며 고단했던 삶의 마지막 울타리가 돼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전용 요양원은 이곳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현지 동포들은 좀 더 많은 시설이 확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타슈켄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외곽에 있는 고려인들을 위한 아리랑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 2026.9.2 phyeonsoo@yna.co.kr
고려인 청소년들의 한국어 교육 및 정체성 유지 프로그램도 예산 부족 등으로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형편이다. 한글학교 등에 대한 지원이 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타티아나 카자흐스탄 내 한국 독립운동가 후손 재단 이사장은 한국 정부의 지원이 해마다 줄어드는 현실을 조목조목 짚으며 "거창한 약속보다 작더라도 꾸준하고 실질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고려인 수난과 투쟁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소중한 자산이다.
박인기 외교부 재외동포정책위원(경인교육대 명예교수)은 "고려인을 비롯한 동포들이 모국으로 귀환해 정착하려 할 때 직면하는 비자 제도의 어려움을 비롯하여 법적·제도적 장벽은 정부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후 관리 시스템 부재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한민국이 고려인 사회에 대해 깊은 역사적 부채 의식을 바탕으로, 교육·노후·정주 권리를 종합적으로 보장하는 실질적 통합 정책을 마련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과 고려인 동포 사회 모두가 상생하는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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