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서 무슨 일이…감호생 소요사건 '민주화운동' 규명 요구

5사단 지휘관 '발포 지시' 첫 양심고백 계기로 저항의 역사 재조명

"전수조사 필요…가해 구조 밝히고 민주화 기여 공로 인정해야"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에서 취침전에 수향록을 쓰고 있다. 1980.08.12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양수연 기자 = 삼청교육대 수용자가 아닌 군 지휘 계통 '가해자'가 부대 내 살상사건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하고 나섰다.

그간 파편적인 조사에 머물렀던 삼청교육대 감호생 소요사건을 전수조사해 진실을 규명하고, '민주화운동'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삼청교육대 사건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계엄 포고 제13호에 의해 군부대에 삼청교육대를 설치하고 영장없이 체포한 6만명 가운데 4만명을 수용, 순화교육과 근로봉사를 시킨 사건이다.

구타와 가혹행위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했고, 재범 위험성이 있다고 분류된 7천500여명은 최장 40개월까지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보호감호 처분이 내려진 이들은 군부대에 계속 수용돼 사회와 격리된 채 노역해야 했다.

삼청교육대 감호생들이 참다못해 항거하는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이들을 총으로 쏴 무력 진압했다는 당시 군 간부의 증언이 나왔다.

전두환 씨 직인 찍힌 '불량배 순화계획에 따른 부수처리 지침'
(서울=연합뉴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전두환 씨가 1980년 당시 삼청교육대 사업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핵심 사업'으로 규정한 문서를 확보했다고 20일 밝혔다. [진실화해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시위 점화된 것"…현장 지휘관 첫 양심고백

1981년 경기 연천의 육군 제5보병사단 삼청교육대에서 발생한 발포사건 당시 현장 지휘관이었던 전 육군 중위 한동철(71)씨는 이달 20일 양심고백을 하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한씨에 따르면 당시 감호생 150여명은 가혹행위에 분노해 흰 속옷을 찢어 머리에 둘러매고 피를 묻힌 뒤 스크럼을 짜고 '당신들은 부모 형제도 없느냐. 왜 우리를 잡아 가둬두고 개·돼지 취급을 하느냐'라고 항거했다.

시위대가 정문을 나갈 것을 우려해 자신을 포함한 지휘부가 사격 개시를 명령했던 일에 대해 한씨는 "앞줄부터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맞아 죽은 사람들은 피바다였다"고 회고했다.

한동철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감호생들의 항의 시위가 인권탄압에 저항하다 터져 나온 것이라고 고백했다.

불법 구금 상태의 이들은 가혹행위를 비롯해 상시적인 감시와 모욕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씨는 "편지 통제와 감시는 당연했고, 점호 때마다 '지금부터 옷을 탈의한다' 하면 싹 벗어야 했다. 팬티 하나 걸치질 못하니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또 태도가 불량하다고 비칠 경우 "뽑아내 가지고 '단독 처리'를 했다"며 "밧줄로 손을 묶어서 독방에다 집어넣으면 상처가 난 곳에 구더기가 기어 다녔다. 그러다 죽거나 정신 이상자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규모 유혈 사태로 이어진 항의 시위는 중대장이 나이 든 감호생의 정강이를 걷어찬 사건에서 촉발됐다고 한다.

한씨는 "'조인트'(정강이 차기)가 점화를 시켜버린 것"이라며 "(감호자들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속에 있는 게 항상 용암이 터지기 전 부글부글 끓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한씨는 '5사단 삼청교육대 유혈 사건과 같은 사례가 다른 곳에서도 있었을 거라 보느냐'는 질문에 "많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 신청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20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 진상규명 신청 기자회견에서 한동철 전 육군 중위(오른쪽)와 이만적 목사가 진실규명 신청서를 들고 있다. 2026.8.20 scape@yna.co.kr

◇ 감춰진 '생존 항쟁'…"민주화운동 인정해야" 요구

삼청교육대 감호생들의 저항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은 그동안 개별 조사 신청을 통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와 진실화해위 등에서 파편적으로 이뤄져 왔으나 전수조사와 책임 소재 규명은 미흡하다.

2기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1981년 1월 25일부터 1982년 12월까지 삼청교육대 보호감호 기간 중 도주 또는 소요 등으로 사회보호법 위반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은 최소 75명이다.

2기 진실화해위는 조사를 마무리하며 진실규명 신청이 접수됐던 27사단 감호생 소요사건과 함께 1·5·15사단 소요사건에 대한 전면 조사를 향후 과제로 제시했다.

피해자들은 이를 통해 불의에 항거한 저항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만적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이사장은 "광주 항쟁은 열어놓은 상태에서 투쟁이 일어났지만, 삼청은 부대에 가둬놓은 울타리에 안에서 총과 맞서야 했던 생존 항쟁"이라며 "직접 정치권을 향해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억압된 체제에 항거하는 운동도 민주화운동"이라고 역설했다.

실제로 민주화운동 관련성이 인정된 드문 사례도 있다.

2002년 의문사위는 5사단 사건에서 발포로 사망한 전정배씨 사건을 직권조사한 뒤 "당시 감호생들의 요구 및 시위행위는 내란죄에 해당하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조치하에서 이뤄진 불법연행·구금 등에 대한 항의였으며 사회보호법에 의한 감호처분에 대한 저항으로서 이는 위법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인정했다.

의문사위는 또 창원 39사단 삼청교육대에서 집단저항을 벌이다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뒤 청송감호소에서 숨진 박영두씨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택승씨는 대법원까지 간 재판 절차를 통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사례다.

삼청교육대 퇴소 후 인권탄압 실태를 폭로한 이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의 기각 결정에 불복해 취소소송을 냈고 2014년 최종 승소했다.

삼청교육 피해자 농성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삼청교육 피해자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1991.5.23

◇ "민주화 질서에 기여…가해 구조에 대한 진실규명 본격화돼야"

전문가들은 삼청교육대 저항 사건들에 대해 포괄적인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강성현 성공회대 평화월딩연구소장은 "개개인의 공로 문제보다도 사건의 성격을 근거로 한 요구"라며 "개별 심사를 떠나 재판 없는 무기한 구금에 대한 집단 항의가 민주화 질서 확립에 기여한 행위였다고 구성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삼청교육대 피해 사건이 진실규명이 늦어지는 사이 개별적인 배·보상이 먼저 이뤄졌던 만큼, 3기 진실화해위에서 집단 소요사건들에 대한 '구조적인 진실규명'이 본격화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강 소장은 "개개인 피해 사실 위주로 개별 소송 등을 통해 보상받으신 분들도 있다"며 "구조적인 진실규명을 위해 피해뿐만 아니라 가해 구조에 대한 본격적인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강 소장은 가해자의 양심고백에 대해 "'피해자이자 가해자' 주장에서 가해 책임이 희석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며 "발포 사건에 대해 지휘계통 책임이 어디까지 소급될 것인지 등 가해 구조에 대해 제대로 조사해야 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숨겨진 피해 양상에 대한 폭넓은 조사도 과제로 꼽힌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완전한 피해 회복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조치들을 재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며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해 전체적인 피해 양상을 조사하고 이를 회복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see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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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보안법 패지 하려는 민주당 종북세력들 증명
    2026.08.2408:16
    삼청교육대 ,민주화 운동 하고 뭔 상관관계가 있다고 민주화? 개나소나 다 민주화라고 지낄이네 , 진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취업도 못 한 사람들이 많은데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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