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만지며 나를 빚는다 [6411의 목소리]

공방에서 흙을 만지는 시간이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하는 작은 힘이 된다는 이들과 함께 일상의 소중함을 배운다. 정유정 제공

정유정 | 도예가·도예공방 운영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다 흙을 만진 지 20년, 도자기 공방을 운영한 지 13년이 되었다. 누군가는 나를 작가로 혹은 선생님이나 사장님으로 부른다. 한때는 이 역할들 사이에서 많이 방황했다. 예술가로서 자존심과 작업실을 유지해야 하는 현실에 늘 부딪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립하고 싶었다. 어딘가의 지원에 기대지 않고 내 힘으로 작업을 지속하려면 두개의 정체성을 모두 껴안아야 했다. 무엇보다 다른 일을 하다 다시 작업대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먼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원 시절, 1평 남짓한 나만의 공간을 배정받았을 때의 설렘은 아직도 선명하다. 작은 책상에서 출발한 작업실은 신당동 공예 레지던시를 거쳐 월세가 저렴한 재개발 지역으로 이어졌다. 그 동네는 무속인이 많아, 손님이 오는 날엔 제발 꽹과리를 치지 않기를, 앞마당에 막걸리만은 뿌리지 않기를 기도하곤 했다. 혼자 운영하다 망할까 두려워 손님이 없어도 늦을 것 같은 날은 택시를 타서라도 오픈 시간을 지켰다. 낮에 수업하고, 아무도 없는 밤에 작업했다. 전시가 코앞이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작업대 옆에 펼쳐둔 간이침대에서 한두시간씩 쪽잠을 자고, 졸음 방지 껌에 의지해가며 꾸벅꾸벅 졸면서도 작업을 이어갔다.

어릴 적 화재를 겪은 뒤 불에 대한 극심한 트라우마가 있던 내게 가마에 가스불을 넣는 일은 거대한 공포 그 자체였다. 밤새 가마를 지키며 ‘혹시 색이 탁하게 나오면 어쩌지, 혹시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가마 문을 여는 것조차 두려웠다. 전시를 마칠 때마다 좋은 기회는 늘어났지만, 통장은 더 가난해졌고, 엉망이 된 작업실로 돌아오면 지독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 공허함 뒤에는 늘 현실이 따라왔다. 자금 압박에 대출 상담 창구에서 꺼이꺼이 울던 창피한 기억도 그중 하나다.

앞만 보고 내달리던 어느 날 결국 몸이 무너졌다. 다시는 작업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무서웠다. 쉼표가 없으면 오래 달릴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내 몸이 부서지고 나서야 비로소 배웠다. 그 뒤로는 도예를 오래도록 품기 위해 내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어렵게 자리 잡은 지금의 성북동 작업실에서 나는 전업 작가라기보다 사람들이 삶에 필요한 도자기를 만들도록 돕는 조력자에 가깝다. 그 조력의 실체는 생각보다 훨씬 고된 것들이다. 흙과 유약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들고, 예약 관리와 청소, 포장, 택배, 홍보, 흙 관리, 수업 준비, 가마 소성(가마에서 굽는 일)까지 일은 넘친다. 보이지 않는 끝없는 일 속에서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던 밤도 수없이 많았다.

흙은 묵묵히 나를 다스리며,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정유정 제공

그럼에도 흙은 묵묵히 나를 다스리며,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몸이 불편하신 분이 물레를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용기를 내어 찾아오시기도 하고, 직장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분이 조용히 작업에 몰두하며 잠시 마음을 쉬어가기도 한다. 커플이 함께 도자기를 만들며 프러포즈를 한 분도 있었다. 흙을 만지기조차 어려워하던 학생들이 ‘덕분에 도예가 재미있어졌다’고 편지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들이 도예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고, 평범한 하루의 가치를 발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도 큰 기쁨이다. 수업에 오는 이들에게 좀 더 나은 방향을 전하고 싶어서, 또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유약과 소지(흙) 연구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폐도자기를 활용해 유약을 만드는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개인 작업과 공방 운영의 균형을 잡는 일은 여전히 서툴고 어렵다. 불량과 예상치 못한 변수, 몸을 쓰는 일에서 오는 크고 작은 통증과 부상도 여전히 함께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균형이 흔들린다고 해서 삶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도자기의 변수도, 삶의 굴곡도 결국은 나를 빚어내는 재료임을 알기 때문이다. 거북이걸음일지라도 꾸준히 공부하며 나아가고 싶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삶, 현재를 충실히 살며 반짝이는 눈으로 내일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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