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압 호황, 배전으로 번진다…청주에서 본 AI 전력망 ‘끝단’

‘물류 셔틀’이 창고 내 자재와 완제품을 운반하고 있다. 자동화 창고 내 랙(철제 선반)을 따라 이동하며 필요한 자재와 완제품을 정확하게 찾아 지정된 위치로 이송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에이치디(HD)현대일렉트릭 제공

8m 높이의 철제 선반 사이에서 큰 키의 로봇이 박스를 꺼내 아래로 내렸다. 바닥을 오가던 낮은 차체의 로봇이 이를 안전펜스 너머 작업자 앞으로 날랐다. 작업자는 로봇이 전해준 박스를 받아 주문별로 제품을 분류하고 포장했다. 박스에 담긴 것은 이 공장에서 생산한 ‘중·저압차단기’. 빌딩과 공장,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에서 이상 전류가 흐를 때 전기를 끊어 설비를 보호하는 장치다.

지난 25일 찾은 충북 청주시 에이치디(HD)현대일렉트릭 청주배전캠퍼스의 중저압차단기 공장 안 완제품 창고에서는 사람보다 로봇이 더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가동을 시작한 이 공장은 자재 입고부터 생산·검사·출하까지 설비와 물류·데이터를 하나로 연결한 ‘스마트 팩토리’다.

이날 저압차단기의 한 종류인 기중차단기(ACB)를 만드는 라인에는 작업자가 6명 있었는데, 제품을 시험·검사하는 공정에는 사람의 손길이 아예 닿지 않았다. 자동 시험설비가 차단기를 약 30차례 여닫아 내구성을 확인하고, 전류와 차단 성능을 시험했다. 비전카메라를 단 로봇은 제품을 훑으며 구멍과 볼트의 누락 여부를 살폈다. 회사 관계자는 “공장 1층과 2층의 자동화율은 각각 65%, 95%”라고 설명했다.

완성된 제품을 검사 중인 비전 검사 시스템. 에이치디현대일렉트릭 제공

회사가 이처럼 자동화에 공을 들인 것은 사용처와 전압·용량이 제각각인 5만여종의 차단기를 빠르고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특히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배전기기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고객이 원하는 여러 사양의 제품을 제때 공급하는 능력이 수주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이창호 에이치디현대일렉트릭 부사장은 “그간 노후 설비 교체가 전력기기 시장을 먼저 이끌었지만, 올해부터 인공지능 관련 투자가 본격화하면서 데이터센터 등 최종 사용처의 배전기기 수요도 함께 늘고 있다”며 “전력기기 수요의 다음 물결은 배전 쪽”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발 전력기기 호황의 중심에는 초고압 변압기와 고압차단기가 있었다. 대규모 전력을 데이터센터 인근까지 보내는 송전·변전 단계에 쓰이는 설비다. 그러나 도착한 전기를 데이터센터가 실제로 사용하려면 전압을 더 낮추고 건물과 설비별로 나눠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배전기기다. 전압을 낮추는 배전변압기, 전력을 나눠 보내는 배전반·분전반, 이상 전류를 끊어 설비를 보호하는 차단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최종 사용처에 가까워질수록 필요한 기기의 수와 종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규모 데이터센터의 전력 인프라에 초고압 변압기 1~2대가 쓰인다면, 전압을 실제 사용에 맞게 더 낮추는 배전변압기는 전력 분산을 위해 10~20대가 필요할 수 있다. 여기에 각 건물과 설비마다 배전반과 차단기도 여러 대 설치된다. 회사가 배전기기를 새로운 성장축으로 보는 이유다.

배선용차단기(MCCB, Molded Case Circuit Breaker) 자동 생산라인의 모습. 에이치디현대일렉트릭 제공

배전기기 시장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다. 엘에스(LS)일렉트릭은 지난 5월 미국 빅테크 기업의 데이터센터에 7천만달러 규모의 배전기기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글로벌 기업 이튼은 미국에 중전압 배전반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고, 슈나이더일렉트릭은 데이터센터 운영사와 3억7300만달러 규모의 전력설비 공급 계약을 맺는 등 글로벌 업체들도 생산능력과 수주를 확대하고 있다.

에이치디현대일렉트릭은 청주배전캠퍼스를 앞세워 이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회사는 중·저압차단기 공장을 시작으로 청주를 여러 배전기기 제품을 아우르는 통합 생산 거점으로 키울 계획이다. 현재 울산에 있는 배전반과 배전변압기 공장을 청주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하고, 생산 전반의 자동화와 데이터 기반 운영을 고도화할 방침이다.

청주배전캠퍼스의 가동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회사의 중·저압차단기 연간 생산능력은 기존 500만대에서 850만대로 약 70% 늘었다. 납기 경쟁력도 높아졌다. 미국 데이터센터용 고사양 제품인 38킬로볼트(㎸)급 진공차단기의 경우 경쟁사 제품은 현지 납기가 통상 1년 이상이지만, 회사는 그 절반 수준의 납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회사 쪽은 이를 바탕으로 38㎸급 진공차단기를 공급하는 대형 데이터센터 프로젝트도 수주했다고 밝혔다.

이창호 부사장은 “2030년까지 중·저압차단기 생산능력을 1300만대로 확대하고, 배전기기 매출 비중도 현재 10%대에서 30% 수준까지 키워 초고압 전력기기 중심의 실적 구조를 보완할 계획”이라며 “배전기기 부문이 실적 안정성을 높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하영 기자 yh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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