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정란 서울성모병원 영성간호부장, 수녀이자 간호사로 약 30년
"호스피스 시설·대상 확대돼야…환자도, 가족도 준비돼야 '좋은 죽음'"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수녀이자 간호사인 라정란 서울성모병원 영성간호부장이 22일 서울성모병원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6.28.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호스피스 현장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며 수많은 죽음을 배웅한 수녀 라정란(61) 서울성모병원 영성간호부장에겐 잊히지 않는 환자와 가족들이 몇몇 있다.
췌장암 말기였던 50대 남성도 그들 중 하나다. 의료진의 만류에도 퇴원을 간절히 원했던 그 환자에게 이유를 물으니 곧 있을 어린이날에 5살 늦둥이 아들과 놀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고 했다. 패혈증 위험 때문에 당장 병원을 나설 상태는 아니었지만 호스피스 병동 의료진은 일단 상태를 호전시킬 시술을 하고 잠시 외출을 허용하기로 했다. 특별한 외출을 응원하기 위해 아이 장난감 선물도 준비했다.
"결국 외출을 하진 못했습니다. 환자 상태가 악화해 임종 방으로 옮겨졌죠. 마지막 인사를 위해 병원에 온 아이에게 우리가 '아빠가 너와 놀러 가는 걸 기다리셨다'며 선물을 건넸어요. 비록 함께 놀러 가진 못했지만 아이에겐 '아빠가 마지막까지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 평생 힘이 될 겁니다."
이렇게 환자의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환자만이 아니라 환자의 가족까지 살피는 것이 바로 수녀이자 간호사인 라 부장이 해온 '영성 간호', '영성 돌봄'이다.
지난 22일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난 라 부장은 "영성 간호라고 하면 환자 옆에서 성경책 펴놓고 기도하는 것만 떠올리는데 영성이 종교적 개념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영성은 삶의 의미를 찾는 등의 실존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말기 환자들은 '내게 왜 이런 고통을 주나', '죽은 다음엔 어디로 가나' 등을 고민하며 영적인 요구가 생기는데, 이런 걸 돌보는 것이 영적 돌봄이죠. 단순히 친절한 것을 넘어 마음을 담아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요새 '돌봄 로봇'도 나온다지만, 신체적 돌봄이 아닌 정신적·영적 돌봄은 인공지능(AI)으로도 결코 대체할 수 없죠."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수녀이자 간호사인 라정란 서울성모병원 영성간호부장이 22일 서울성모병원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6.28.
라 부장이 이끄는 서울성모병원 영성간호부는 지난해 9월 신설됐다. 가톨릭 의료기관으로서 영성 분야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와 가정간호센터가 영성간호부 소속으로 편입됐다.
라 부장은 간호대 재학 중에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받았고, 이후 이런저런 일들이 잘 풀리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졸업 후 5년간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 갖다 드린 후 수녀원에 들어갔다. 이후 1998년 서울성모병원으로 오면서 30년 가까이 수도자이자 의료인으로 살았다.
때론 수도회에서의 공동생활과 직장생활이 병행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고, 특히 관리자로서 부서원의 이익을 챙겨야 하는 자리에서 마냥 수도자의 너그러움을 유지할 순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라 부장은 "생명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돌본다는 점에서 간호사와 수도자의 정신이 잘 맞다"며 두 역할이 서로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의료 현장에서도 라 부장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호스피스 현장이다. 호스피스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신체·심리·영적 영역에서 종합적 평가와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 서비스다. 서울성모병원은 주요 대형병원, 이른바 '빅5' 중 유일하게 호스피스 입원 병동을 운영한다.
한 해 수백 명의 마지막을 함께 한 그는 "죽음이 다가오면 싫고, 두렵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 다 비슷했다"며 "결국은 받아들이고 잘 인사하고 가시면 좋지만,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어 그런 분들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어린 환자나 가족들도 많이 기억에 남는다.
3살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줄곧 치료받느라 흔한 딸기케이크 맛도 몰랐던 6살 아이는 병동 수녀로부터 죽음에 관한 설명을 듣고는 엄마와 함께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했다가, '엄마는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곧장 이해했다. 유니콘을 타고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던 어떤 아이를 위해 날개와 뿔이 달린 유니콘 인형을 찾아 다녔던 기억도 선하다.
"제가 많이 배웁니다. 환자분들이 삶을 정리하고 가시는 과정을 보면서 저도 제 삶을 정리하게 되고요. 사랑하는 이들을 보낸 분들을 위로하면서 저희도 마음의 위로를 얻죠."
라 부장은 대형병원에 입원형 호스피스가 좀 더 늘어나고, 대상자도 더 늘어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호스피스는 입원형, 가정형, 자문형으로 나뉘는데, 입원형의 경우 말기 암 환자만 가능하다.
'존엄사'나 '웰다잉', '안락사' 등의 용어가 명확한 기준 없이 혼용돼 혼란을 야기하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존엄사나 웰다잉은 원래 되게 좋은 거예요. 마지막 순간까지 편안하게 인간답게 있다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단순히 호흡기를 떼는 행위가 존엄사로 인식되고, 인위적인 안락사도 좋은 죽음으로 여겨지죠. 단어들을 신중하게 썼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라 부장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준비된 죽음입니다. 본인이 준비가 되고, 보내는 사람이 준비가 돼야 하죠. 수도자로서는 하느님이 맞으실 준비가 된 것도 포함되고요.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에 몸을 움직이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목욕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 와도, 그것 역시 죽음의 과정이라고 잘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mihy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