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미의 K-씨어터] 네 개의 독백, 하나의 외로움, '매니 문'

연극 '매니 문' 포스터
[아르코 예술극장 홈페이지 캡처]

관객은 연극을 볼 때 일반적으로 인물 간 대화를 통해 작품을 이해한다. 한 사람이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대답하고, 그 대화 속에서 인물의 관계와 사건을 알아간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무엇 때문에 갈등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사건과 상황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기 마련이다.

지난 7일 종영한 '매니 문'(Many Moons·10월 1~7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은 이 익숙한 극작의 질서를 첫 장면부터 흔들어놓는다.

손원정이 번역·연출한 이 작품에는 임신한 여성 메그, 사랑을 찾는 젊은 여성 주니퍼, 세상과 좀처럼 연결되지 못하는 청년 올리, 병든 아내를 돌보는 로버트가 등장한다. 네 사람은 같은 무대에 있지만 처음부터 하나의 사건으로 묶이지 않는다. 각자의 삶은 병렬적으로 놓이고, 네 개의 목소리는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처음에는 꽤 혼란스럽다. 누가 누구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들은 서로 어떤 관계인지가 도무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상대의 응답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거나 사건이 전개되지 않고 각 인물은 자신의 순서가 되면 그저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극은 다시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가 잘 잡히지 않을수록 정서 하나가 또렷해진다. 외로움이다.

그래서 네 사람의 삶은 서로 다르고 각자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도 않지만, 완전히 분리된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은 누군가를 원하지만 닿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말해도 관계는 불안하며, 곁에 있으면서도 혼자인 사람들이다. 이들 각각의 사연은 서로 맞물리지 않아 번번이 틈이 생기는데, 그 사이로 시간이 흐를수록 비슷한 온도의 감정이 쌓여간다.

바로 여기에 '매니 문'의 독특한 극작의 특징이 드러난다. 작가 버치는 인물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하기보다, 서로에게 닿지 않는 각자의 삶을 병치하고 그 간극에서 관객이 하나의 공통된 감각을 발견하도록 한다.

일반적인 희곡이라면 인물이 왜 외로운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의 상처나 관계의 갈등을 통해 그 원인을 보여주면 훨씬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니 문'은 애초부터 관객이 인물에게 쉽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인물을 인과와 전후 사정으로 이해하려 할수록 이야기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거나 틀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은 외로운 사람을 보여주거나 외로움을 들려주는 연극이라기보다 관객에게 외로움의 상태를 경험시키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외롭다는 말을 쓰고 외로운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형식의 고립을 통해 구조를 외롭게 만드는 식이다. 단절을 설명하기보다 인물들을 실제로 분리해 놓고, 외로운 관계에 대해 말하기보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나란히 병치하는 방식을 택한다.

내용을, 형식이 수행하는 셈이다.

우리는 창작극을 이야기할 때 흔히 '무엇을 말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작품이 다루는 사회적 문제와 소재의 시의성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극작을 판단할 때, 이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희곡은 무대 위에서 실현되는 글인 만큼, 그 이야기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뿐 아니라 관객에게 '어떻게 경험시킬 것인가'까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매니 문'은 외로움과 고립을 인물의 대사나 사건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이 그 상태를 실제로 경험하도록 희곡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킨 작품이다.

물론 작가의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은 당혹스러울 수 있다. 네 사람의 관계와 사건을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고, 조금만 균형이 흐트러져도 관객은 산만하다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형식적 실험은 단순히 '새롭다'는 사실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낯선 형식이 실제로 관객에게 어떤 감각을 만들어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그 균형을 잡아내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배우의 힘이 컸다.

메그 역의 문현정은 그녀만의 독특한 리듬과 호흡, 음색을 가지고 분절된 언어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었다. 문장을 또렷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순간의 망설임과 호흡을 적절히 품어냄으로써 메그의 정서를 드러냈다. 덕분에 대사의 내용과 흐름을 분명하게 인지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메그라는 인물의 감정과 상태를 감각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배우 김정호(로버트 역)는 또 다른 방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로버트라는 인물의 감정을 덧칠하거나 인물에 대한 정보나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김정호가 이번 무대에서 보여주려던 연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혹은 '하려고 하지 않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였는지 무대 위에 마치 실존하는 로버트가 자신의 처절하게 외로운 시간을 견디고 있는 듯 보였으며, 그의 힘겨운 삶의 정서는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정호가 보여준 무위(無爲)의 연기는 결국, 무언가를 더 보태기보다 덜어내고 머무는 데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인물의 존재를 선명하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손원정이 연출한 무대는 텍스트의 구조를 공간으로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줬다. 초반 네 명의 배우는 각자의 영역 안에 머물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경계가 조금씩 풀리고, 배우들은 서로의 공간을 가로지르거나 통과한다. 대화를 하지 않지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비껴가는 행위와 동선이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냈다.

멈춰 있거나 각자의 공간에 머물던 네 개의 몸이 교차되면서 관객은 서로 분리돼 있던 네 개의 시간을 점차 하나의 무대적 시공간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여러 개의 달을 뜻하는 제목 'Many Moons'는 공연이 끝난 뒤 의미가 좀 더 깊게 다가온다. 제목에는 저마다 자기 세계 안에 머물면서도 같은 어둠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겹친다. 이들은 끝내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지 않고 서로를 스쳐 지나가지만, 바로 그 거리 때문에 이 작품의 '외로움'은 개인의 특별한 사연을 넘어 인간이 피하기 어려운 보편적인 조건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서로에게 끝내 닿지 못하는 거리는 이 작품이 끝까지 유지한 정서적 조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버치의 '매니 문'이 흥미로운 것은 이미 익숙한 외로움과 고립이라는 감정을, 익숙하지 않은 극작의 구조 안에 다시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까지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형식 자체가 관객에게 감각되고 체험될 때, 희곡은 또 다른 방식으로 말을 시작할 수 있다. '매니 문'이 보여준 극작의 가능성은 바로 그 지점이다.

선연(禪蓮)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한국연극'·'객석' 연극전문 기자

조회 13 스크랩 0 공유 0
댓글 0
댓글 정렬 옵션 선택
댓글이 없습니다.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