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차 없는 뚜벅이는 천리포수목원에 어떻게 가라는 거야?”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말에 ‘그러게나 말이다’라고 맞장구치려는 걸 겨우 참았다. 대중교통으로? 올 수는 있다. 일단 어떻게든 태안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한시간에 한대 있는 시내버스를 타고 50분 정도 더 와야 하는데, 소요 시간은 버스 기사님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고… 그렇게까지 수목원을 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따져보다 보면, ‘천리포수목원이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옆에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이다. 멋진 가을 날씨가 이어지면 아름다운 수목원 풍경을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데, 그런 마음을 더 동하게 하는 나무가 있다. 바로 산이나 공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수목원에서 특히 더 아름다운 매력을 선보이는 단풍나무다.
단풍나무는 무환자나무과 단풍나무속에 속한다. 단풍나무속 식물은 북반구의 온대 지역에서 폭넓게 자생하는데, 자연 상태의 교잡도 흔할뿐더러 정원수로 적합한 성질만 남겨 개량된 품종도 수천 종류에 달한다. 천리포수목원은 약 271분류군에 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단풍나무를 수집해 보전하고 있다. 단풍나무속 식물을 집중적으로 심은 구역은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교육·연구수목원 북쪽에 자리해 있는데, 수목원 가드너들은 이곳을 단풍나무원이라고 부른다.


어렸을 적 가족들과 종종 찾았던 오대산 국립공원에는 계곡가를 따라 단풍나무 군락이 있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계곡가의 돌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리던 단풍나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단풍나무는 그늘을 견디는 힘이 강한 음수(陰樹)에 속해, 그늘진 빌딩 사이나 도심의 공원에서도 잘 버티는 편이다. 정원에 긴 시간 그늘지는 공간이 있을 때 심을 만한 나무로 가장 먼저 단풍나무를 꼽아보는 이유도 이런 특성 덕분이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이는 천리포수목원은 10월 중순이 지나야 조금씩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마치 공작새가 날개를 펼친 듯 잎이 깊게 갈라지는 공작단풍, 잎자루가 짧아 굵은 가지에 잎이 딱 붙어 자라는 것처럼 보여 분재로도 인기가 많은 단풍나무 ‘시시가시라’ 등 다양한 형태의 단풍나무가 모여 자라고 있다. 수액을 채취해 메이플 시럽을 만드는 설탕단풍도 있다. 캐나다 국기에서 금방 떼어낸 것 같은 잎의 모양도 독특할뿐더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선명한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으로 물드는 모습도 매력적이다.



매의 눈으로 산책하다 보면 단풍나무의 병해도 찾아볼 수 있다. 단풍나무원 산책로 바로 옆에서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 ‘오쿠시모’에는 굵은 줄기 가운데에 큰 혹이 붙어있다. 근두암종병이라고 불리는 병해인데, 주로 세균 감염으로 인해 목질 조직이 이상 비대해지면서 생기는 증상이다. 부푼 조직은 부러지기 쉬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라면 가지치기해야 하지만,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구역이고 가지치기가 어려운 기둥에 병징이 생긴 상황이라 지속적으로 상태를 살펴보는 중이다.


몇몇 나무는 ‘단풍나무는 가을에만 아름답다’는 고정관념을 깬다. 사계절 내내 푸른 수피를 선보이는 데이비드사피단풍과 일본홍시닥나무가 그렇다. 데이비드사피단풍의 줄기를 자세히 보면 마치 뱀의 껍질처럼 독특한 검은 비늘무늬가 보인다. ‘다비드’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 선교사가 중국에서 발견한 나무인 데다, 수피가 뱀의 껍질(蛇皮)을 닮아 이 이름이 붙었다. 일본홍시닥나무의 선명하고 매끈한 초록색 수피, 그리고 검붉은 색에 가깝게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다 보면 마치 가짜 나뭇가지와 가짜 단풍잎을 숲에다 꽂아다 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곤 한다.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화려한 단풍을 살펴볼 수 있는 천리포수목원의 가을 비밀의 숲은 1년에 단 한달만 만나볼 수 있다.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손쉽게 올 수 있는 위치를 생각했을 때 홍대입구역을 떠올렸다가, 서울을 떠나온 지 몇년이나 지났으면서도 여전히 삶의 감각이 서울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아 좀 억울한 느낌도 든다. 사람과 부가 모두 한곳으로만 모이는 사회가 건강할 리가 없다는 걸 지역에 살면서 더 체감하는데, 그럴 때마다 치솟는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에 필적할 만한 거주 이유를 안간힘을 써 찾곤 한다. 하루가 다르게 선명해지는 단풍잎, 부쩍 차가워진 가을의 바닷바람, 곧 겨울잠을 준비해야 할 것처럼 고요한 시골의 밤. 그런 것들이 이곳에서 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살아보면서 확인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