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부 발간 세계유산책자, 군함도·사도 조선인강제동원 '삭제'

문부성, '유네스코 가입 75주년 기념' 책자 발간 지원·지자체 제작 협력

조선인 강제노동 일절 언급 없이 자국 영광만 부각…"세계유산위 권고 위반"

(도쿄=연합뉴스) 조성미 특파원 = 일본 정부가 근현대 산업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당시에 한 약속과 달리 조선인 강제노동이 행해진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 또다시 역사적 과오를 빼놓은 세계유산 가이드북을 펴내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14일 연합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일본의 유네스코 가입 75주년을 기념해 자국 내 세계유산에 대해 소개하는 정보 책자가 발간돼 일본 전역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유적지를 둘러보는 여행'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자는 일본 문부과학성이 추진하는 기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간됐으며 세계유산과 관련된 지방자치단체들이 제작에 협력했다.

책에는 지난 7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된 나라현의 '아스카·후지와라 고대 수도'를 제외한 총 26건의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문제는 이 책이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 포함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2015년 등재) 지역들과 사도광산(2024년 등재)을 소개하면서 역사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책자는 사도광산에 대해 에도막부를 지탱한 일본 최대 금 생산지였다며 17세기 이곳에서 캔 금이 전 세계 금의 약 10%를 차지했다는 등의 에도시대 당시 유명한 금 광산으로서의 면모에만 치중해 소개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제작 지원한 세계유산 소개서
(도쿄=연합뉴스) 조성미 특파원 = 일본 정부가 근현대 산업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당시에 한 약속과 달리 조선인 강제노동이 행해진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 또다시 역사적 과오 서술을 뺀 세계유산 가이드북을 펴냈다. 사진은 사도광산 서술(좌)과 군함도 서술 부분. 2026.9.14 csm@yna.co.kr

일본이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를 포함하는 전체 역사가 아닌 역사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에도시대만 조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는데 이 책에서도 같은 전략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 광산은 에도시대에는 금광으로 유명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한 뒤에는 구리, 철, 아연 등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주로 이용됐고 1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노역에 동원됐다.

이 책은 사도광산 유적지 내부에 "광산 갱내에서 일하는 장인(職人)들의 모형이 전시돼 있다"라고도 소개했는데, 광산 노동의 주체로서 조선인 노동자를 지우고 일본인 숙련공을 부각하려 했다는 해석을 낳는다.

책은 "일은 가혹했지만, 당시의 그들은 굉장한 고임금을 받고 있었다"며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임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던 사실도 희석하고 있다.

이 책이 일본 세계유산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을 지우는 방식은 사도광산뿐 아니라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가 포함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은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 대해 "사무라이들에 의한 근대화 프로젝트의 증거"라고 치켜세우며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일본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속도로 산업혁명을 달성한 것을 알려주는 유산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을 소개한 2페이지 중 1페이지를 군함도 소개에 할애하며 "첨단 기술을 갖췄던 해상도시 군함도"라고 서술했다.

군함도에서 조선인 강제노역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하시마 탄광에 대해서는 "세계 유수의 해저광산으로서 국내외 석탄 수요를 뒷받침했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일본 정부는 군함도가 포함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전후해 일제강점기 때 이뤄진 조선인 강제 동원에 관해 설명하겠다고 공식 약속한 바 있으나 지키지 않고 있다.

과거사를 소개하겠다면서 2020년 군함도와 멀리 떨어진 도쿄에 문을 연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조선인 동원에 대한 소개가 아닌 자국 산업화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내용으로 채웠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유산과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이후 국제사회와 약속을 저버린 데 대해 한국 정부는 사도광산 등재 이후 3년 연속 희생자 추도식을 일본과 별도로 열고 있다.

지난 7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당시 약속과 달리 조선인 강제노동이 이뤄진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아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정문을 채택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문부과학성이 지원한 세계유산 설명 책자가 역사 문제를 지운 데 대해 "조선인 강제노동 역사를 철저히 은폐하는 일본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역사 부정론이 되풀이된 것이자 세계유산위원회 권고를 명백히 어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cs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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