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대신 온라인 바둑"…코로나19 영향으로 줄폐업

"이번 추석 연휴에도 기원을 열 생각이에요. 가족이 없는 독거노인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까…"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A기원에서 만난 60대 원장 이모씨는 "우리나라에는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한 공간이 별로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평일 오후인 이날도 기원 안에서는 40명이 넘는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대화는 많지 않았다. 간간이 작은 대화 소리와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한쪽에서는 바둑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대국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고령층이 저렴한 비용으로 하루를 보내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해온 기원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용객 감소와 임대료 상승 등으로 경영난을 겪으면서다. 일부 기원은 수익을 내기 위해 불법 도박을 허용하는 곳으로 변질되고 있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만큼 노인들이 일상적으로 머물 수 있는 생활·문화 공간을 확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원은 특히 은퇴한 고령 남성들의 대표적인 여가 공간으로 자리 잡아왔다. 대한바둑협회가 2024년 전국 18세 이상 성인 남녀 15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바둑을 둘 줄 안다'고 답한 응답자 가운데 60대 이상이 40.1%를 차지했다. 30대는 11.2%에 그쳤다.
적은 비용으로 오랜 시간 머물 수 있다는 것도 기원의 특징이다. 이날 머니투데이가 둘러본 서울 시내 기원의 입장료인 '기료'는 하루 4000~8000원 수준이었다. 기료만 내면 영업시간 동안 자유롭게 바둑을 둘 수 있다.
같은 날 종로구 B기원에서도 70명이 넘는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기원에 들어선 이용객들은 익숙한 듯 서로 인사를 건넸다. 최근까지 이 기원을 운영했다는 70대 서병길씨는 "동네보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며 "기원은 노인들의 유일한 안식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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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줄고 임대료는 올라"…경영난에 '도박장' 전락한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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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같은 기원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정부는 '기원 운영업'을 별도 업종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업종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사업체 수 등 관련 통계를 별도로 집계하지 않는다. 업계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폐업하는 기원이 늘었다고 입을 모았다.
당초 건물 2개 층을 사용했던 B기원도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부터 1개 층으로 규모를 줄였다. 기원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60대 장모씨는 "코로나19 전에는 자리가 없어서 기다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널널하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에서 C기원을 운영하는 김모씨(65)는 "팬데믹을 겪으며 인근 기원 4곳이 모두 폐업했다"며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사람들도 온라인 바둑을 두기 시작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용객은 줄었지만 임대료 등 고정비 부담은 커지면서 하루 수천원 수준의 기료만으로 운영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게 업주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일부 기원은 화투나 포커 등 불법 도박을 허용하고 일반 기원보다 높은 기료를 받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씨는 "밤이면 문을 닫는 일반적인 기원과 달리 도박을 하는 곳들은 밤에도 불을 켜고 있다"며 "낮에는 술 내기 정도에 그치다 밤이 되면 5만원까지도 판돈을 거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기원이 불법 도박장으로 변질되면서 강력범죄로 이어진 사례도 발생했다. 지난달 노원구 한 기원에서는 60대 남성이 불법 도박을 하던 중 시비가 붙어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기원에서는 약 2년간 불법 도박이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북부지검은 지난달 31일 해당 기원 업주와 방문객 등 5명을 도박장소 개설과 도박 혐의 등으로 약식기소했다.
경찰도 일부 기원이 불법 도박장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지만 현장 단속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한다. 한 지구대 소속 경감은 "도박 범죄를 인지하고 기원을 찾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장이 없어 문을 강제 개방하거나 수색할 수 없다"며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면 이미 현장을 치운 상태"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기원의 쇠퇴를 단순히 바둑 인구 감소나 개별 업종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의료시설만큼이나 생활·문화 공간도 노인 정신 건강에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특히 남성들은 은퇴 이후 직장에서 쌓아온 공적 네트워크가 사라져 외로움을 더 크게 느낀다"며 "노인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만큼 기원뿐만 아니라 취미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