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로 둘러싸인 고층 빌딩은 기후 변화에 어이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빛은 통유리를 통해 실내 깊숙이 들어오고, 건물 내부는 순식간에 거대한 온실처럼 달아오른다. 지구 전체의 온실효과가 유리 상자 안에서 똑같이 재현되는 꼴이다. 찜통더위를 식히기 위해 에어컨을 강하게 돌려야 하니,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든 통유리를 다시 엄청난 전기로 식혀야 하는 기묘한 악순환이 반복된다.

먼 옛날 아라비아의 모래밭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리는 오랫동안 작은 보석이나 장식품의 영역에 머물렀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야 얇은 판 형태로 창에 쓰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빛을 어렴풋이 통과시키는 반투명한 막에 지나지 않았다. 완전히 맑고 투명한 판유리가 대량 생산되기까지는 그로부터도 1천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건물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유리는 ‘벽’이라는 개념을 뿌리째 흔들었다. 수천년 동안 집 안과 밖을 철저히 갈라놓던 묵직한 벽 대신, 햇살을 품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벽’이 들어선 것이다.
19세기 영국 런던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수정궁(Crystal Palace)은 그 예고편이었다. 철골과 유리만으로 지어진 거대한 온실 같은 건축물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20세기 현대 건축가들은 이 투명함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건축 거장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는 뼈대와 외벽을 분리하는 ‘커튼월’(curtain wall) 공법을 통해 건물 전체를 유리로 둘러싸는 길을 열었다. 서울 삼일빌딩의 모태가 된 미국 뉴욕 시그램 빌딩은 그 선언과도 같았다. 건축가들은 답답한 벽 대신 투명한 유리를 올렸고, 도시는 거대한 ‘유리 상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건물의 외관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건물 안에서는 도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밖에서는 건물 안 사람들의 움직임이 하나의 도시 풍경이 되었다. 탁 트인 개방성과 기능성, 효율성을 선망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유리 마천루는 세련된 현대 문명이자 기술과 자본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지금의 지구가 그 시절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여름철 평균 기온이 30도 안팎이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뉴노멀’로 자리 잡았다. 서울은 이미 2018년 최고기온 39.6도라는 관측 사상 기록을 세웠고, 올해는 기어이 40도를 넘어섰다. 기후 위기는 지금까지 집을 짓던 기본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리로 둘러싸인 고층 빌딩은 이러한 기후 변화에 어이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빛은 통유리를 통해 실내 깊숙이 들어오고, 건물 내부는 순식간에 거대한 온실처럼 달아오른다. 지구 전체의 온실효과가 유리 상자 안에서 똑같이 재현되는 꼴이다. 찜통더위를 식히기 위해 에어컨을 강하게 돌려야 하니,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든 통유리를 다시 엄청난 전기로 식혀야 하는 기묘한 악순환이 반복된다. 높이 솟은 고층 건물일수록 사정은 더 심각하다. 강한 바람과 안전 문제 때문에 창문을 제대로 열 수도 없다. 맑은 외부 공기로 자연스럽게 환기하는 것은 어렵고, 오직 기계식 냉난방 장치에 의존해 숨을 쉬어야 한다. 건축 대학에서 이런 설계안을 제출한 학생은 낙제점을 받는다.
오늘날 한국의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이러한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통유리 외관과 스카이라운지, 컨시어지, 조식 서비스 같은 화려한 편의시설은 소위 프리미엄 라이프 스타일을 약속한다. 건물의 에너지 효율보다 화려한 외관과 서비스라는 상업적 포장재가 집값을 결정하는 구조다. 그러나 분양 광고는 그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비와 냉방비를 말하지 않는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열기를 막기 위해 에어컨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그 비용은 거주자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건축가가 그린 아름다운 도면에는 그 건물에서 살아갈 사람이 감당해야 할 관리비 고지서는 적혀 있지 않다. 싼 가격에 건물을 지어 비싸게 분양한 시행사는 행복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막대한 환경·경제적 비용은 입주자가 수십년간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 여름 기온은 더 올라갈 것이고 고갈을 앞둔 화석에너지의 비용 또한 높아질 일만 남았다.
유럽의 도시들은 이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해답이 ‘유리를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핵심은 태양빛이 유리창에 직접 도달하기 전에 미리 가려주는 것이다. 집 안쪽에 블라인드를 치는 것보다 건물 바깥쪽에 차양(brise-soleil)을 설치하는 것이 열 차단에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태양열이 유리를 통과한 뒤 막는 것과, 유리창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깊은 처마와 외부 블라인드, 수직 차양막, 발코니 같은 전통적인 햇빛 가리개들이 현대 건축에서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더 나아가 최근 현대 건축은 ‘이중스킨’(double skin)이라는 외벽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유리와 유리 사이에 공기 완충 공간을 만들고 바람의 흐름을 조절하거나, 계절과 날씨에 따라 외벽이 스스로 열리고 닫히게 만드는 방식이다. 건물의 외벽을 그저 보기 좋은 껍데기가 아니라 햇빛과 바람을 스스로 조절하는 ‘숨 쉬는 피부’로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첨단 기술이라기보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건축의 지혜를 다시 꺼내 든 것에 가깝다. 우리 전통 한옥의 깊은 처마와 넓은 마당, 툇마루와 창호 역시 햇빛과 바람, 비를 자연스럽게 조절하기 위한 장치였다. 처마의 깊이는 여름 정오의 뜨거운 햇살은 막아 내고 겨울의 낮게 뜬 햇살은 방 안 깊숙이 끌어들이도록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에어컨이나 히터가 없던 시절의 건축가들은 건물 자체로 자연과 호흡하며 더위와 추위에 대응했다.
우리는 그 오래된 지혜를 잊은 채 서구 근대의 문법대로 거대한 유리 상자를 세웠고, 그 대가를 매달 비싼 기계식 냉난방 비용으로 치르고 있다. 유리 마천루가 도시 풍경에 가져다준 탁 트인 시야와 현대적인 미학을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기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했는데, 건축을 향한 우리의 욕망만 수십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문제다. 언제까지 이 계산서를 외면할 수 있을까. 건축주는 준공식에서 박수를 받고, 시행사는 분양률을 자랑하고, 건축가는 포트폴리오에 근사한 사진 한장을 남긴다. 그러나 그 뒤에 남는 것은 해마다 여름이면 날아드는 관리비 고지서와 밤에도 식지 않는 콘크리트와 유리 덩어리, 그리고 도시 전체를 데우는 ‘열섬’이다. 그 청구서의 수신인은 건축가도 시행사도 아닌, 그 집에서 수십년을 살 사람들이다.

유리는 한때 문명과 진보의 언어였다. 투명함은 개방성을, 높이는 야망을, 반짝임은 성공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구가 더 이상 그 언어를 감당할 수 없다면, 같은 언어를 반복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폐습’이다. 고정된 껍데기로 덮인 건물은 이제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다. 햇빛을 가리고, 바람을 받아들이고, 열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스스로 열리고 닫히는 살아 있는 경계가 되어야 바뀐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가 올리고 있는 눈부신 유리 마천루가 훗날 ‘기후 위기 시대의 마지막 사치’로 기억되지 않으려면, 이제 건축은 다른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이 건물은 변화한 지구에서 좋은 집인가, 나쁜 집인가.

임우진 | 건축가. 이론보다 현장을, 현상보다 그 원인을, 그리고 건물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공간과 도시를 만들어왔다. 25년간 파리에서 활동 중이며, 여러 나라에 살면서 체화한 통문화적 시선으로 비판보다는 영감에, 우월함보다는 다양성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관심의 일부를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에 담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