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6일부터 11월8일까지 열리는 이대원 회고전 ‘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작가의 회화를 단순히 화려한 원색의 풍경화로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서구에서 유입된 유화라는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전통 자수와 나전칠기, 화각공예의 색채 감각, 동양 산수화의 필묵과 운필을 화면 안에 녹여낸 과정을 통해 이대원이 구축한 독자적인 현대회화의 성격을 살펴보는 전시다.
이대원의 화면을 가장 먼저 특징짓는 것은 붉은색과 청색, 황색과 녹색이 서로 뒤섞이지 않은 채 촘촘하게 축적된 점과 선이다. 이 때문에 그의 회화는 오랫동안 서양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의 점묘법과 비교돼 왔다. 그러나 이대원의 색점은 조르주 쇠라로 대표되는 서구 점묘법의 광학적 원리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서양의 점묘법은 서로 다른 원색의 점을 캔버스 위에 분리해 배치한 뒤,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볼 때 관람자의 눈과 뇌에서 색이 혼합되도록 하는 ‘시각적 혼색’을 지향한다. 개별 색점은 최종적으로 하나의 통합된 빛과 색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광학적 단위다. 반면 이대원의 색점과 색선은 서로 섞이거나 하나의 색조로 수렴하지 않는다. 각각의 색은 화면 위에서 고유한 밝기와 발색을 유지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의 붓질은 빛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색채의 입자라기보다, 전통 자수 병풍의 표면을 가로지르는 색실에 가깝다. 붉은색과 청색, 노란색과 초록색의 짧은 붓질은 화면 위에 겹겹이 놓이면서도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마치 수많은 색실이 교차하며 하나의 문양과 표면을 만들어내듯, 각각의 색은 독립성을 유지한 채 전체 화면의 밀도와 리듬을 형성한다. 그의 유화는 색을 섞어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색을 짜고 엮어 자연의 감각을 구축하는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색채 감각은 이대원이 수집하고 탐구했던 전통 공예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자수와 나전칠기, 화각공예에서 나타나는 선명한 원색의 대비와 장식적 평면성은 유화 물감의 점과 선으로 치환됐다. 색채의 파편들은 명암을 통해 서양식 입체감을 만드는 대신, 공예품의 표면처럼 화면 자체가 빛을 머금도록 한다. 자연의 형태는 깊은 원근 속으로 물러나기보다 화면 앞으로 떠오르고, 풍경은 재현된 공간인 동시에 촉각적인 색채의 표면으로 전환된다.

전통 공예의 색채 감각이 화면의 표면을 구성한다면, 동양 산수화의 필묵은 화면의 호흡과 운동을 형성한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파주 농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작품에서 이대원의 붓질은 점차 자유롭고 대담해진다. 초기의 단정하고 짧은 색점은 후기 작업으로 갈수록 길고 폭넓은 색선으로 변화하며, 나무와 밭, 연못과 산의 형태를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필선은 동양 산수화의 태점(苔點), 적묵법(積墨法), 준법(皴法), 수지법(樹枝法)을 유화의 물질과 색채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위와 나무, 풀과 이끼에 생기를 더하기 위해 먹점을 찍는 태점은 그의 화면에서 강렬한 원색의 점으로 변환된다. 이 점들은 사물의 세부를 설명하기보다 화면 곳곳에 맥박처럼 퍼지며 자연의 생명력을 환기한다. 하나의 점은 꽃이나 잎, 열매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화면의 리듬을 만드는 자율적인 조형 요소가 된다.

옅은 먹에서 시작해 먹을 거듭 쌓으며 깊이를 만드는 적묵법 역시 이대원의 회화에서는 색채의 축적으로 새롭게 나타난다. 작가는 물감을 칠하고 말린 뒤 다시 점과 선을 덧입히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화면의 깊이는 서양식 원근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에 가해진 붓질의 층에서 발생한다. 캔버스는 한순간 포착된 풍경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 개화와 낙엽, 계절의 변화가 중첩된 시간의 지층이 된다.

산과 바위의 표면을 표현하는 준법과 나뭇가지의 뻗어남을 그리는 수지법은 후기의 굵고 빠른 색선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변용된다. 이때 붓질은 대상을 따라가는 묘사의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붓이 움직인 속도와 방향, 압력과 호흡이 화면에 직접 남으면서 선 자체가 자연의 기세를 전달한다. 나무는 정확한 윤곽으로 재현되기보다 수직과 사선으로 뻗어 나가는 색선의 집합으로 나타나고, 밭과 연못은 반복되는 붓질의 파동으로 펼쳐진다.

이대원의 풍경에서 서양식 원근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기 작업으로 갈수록 전경과 후경의 구분은 느슨해지고, 색점과 색선이 화면 전체를 균등하게 채우면서 시선은 특정한 소실점을 향해 수렴하지 않는다. 관람자의 눈은 화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대신, 표면 곳곳을 이동하며 색채와 붓질의 리듬을 따라가게 된다. 자연은 멀리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시선과 몸이 함께 호흡하는 장으로 바뀐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대원의 회화는 서구적 의미의 ‘풍경’에서 동양적 의미의 ‘산수’로 이동한다. 풍경이 인간의 시점에서 외부 세계를 관찰하고 재현한 장면이라면, 산수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기운과 생명의 질서를 경험하는 세계에 가깝다. 이대원은 파주 농원의 실제 나무와 연못, 밭과 산을 그렸지만, 그의 후기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다. 자연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생활하며 체득한 감각과 시간, 생명의 운동을 회화의 리듬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점과 선은 꽃과 나무를 묘사하는 형식인 동시에, 자연과 마주한 화가의 몸이 남긴 흔적이다. 점은 태점처럼 생명의 기운을 응축하고, 선은 서예의 획처럼 호흡과 운동을 기록한다. 화면은 자연의 외형을 모사한 이미지가 아니라 색과 붓질을 통해 자연의 생성 원리를 다시 수행하는 장소가 된다. 이대원의 회화를 단순한 원색 풍경이나 장식적 회화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이대원이 성취한 ‘한국적 모더니즘’은 전통적 소재를 현대적으로 그렸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서구 유화의 재료와 형식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광학적 재현이나 원근법의 체계에 그대로 종속시키지 않았다. 대신 전통 자수와 나전·화각의 색채적 평면성, 산수화의 태점과 적묵, 준법과 운필의 원리를 유화의 물성과 결합해 새로운 조형 언어로 전환했다.
그의 화면에서 전통은 과거의 양식을 인용하거나 복원하는 대상이 아니다. 색을 놓는 방식, 붓을 움직이는 호흡, 화면의 깊이를 구성하는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현재화되는 감각의 구조다. 서구의 유화와 한국의 전통 공예, 동양 산수화가 충돌하고 스며드는 가운데 이대원은 어느 한쪽에도 귀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회화의 지평을 열었다.
결국 이대원의 그림은 유화로 그린 한국 풍경이 아니라, 원색의 색실로 짜고 동양적 획의 호흡으로 일으켜 세운 현대의 산수라 할 수 있다. 그의 화면 속 자연은 고정된 경치가 아니라 색점이 피어나고 색선이 흔들리며 끊임없이 생성되는 생명의 장이다. 그리고 이 조형적 변용의 과정에서 이대원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한국적 현대회화’를 완성했다.
이대원(李大源, 1921–2005) 화백은 ‘화단의 신사’, ‘색채의 마법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수식어와 함께 과수원과 산, 연못을 원색의 점과 선으로 채운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온 작가로 밝음이 작가의 타고난 낙천성으로 해석 되어왔다. 전시 제목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1922–1993)이 이대원의 작품을 두고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평한 데서 가져왔다. 김원룡의 이 말은 이대원의 화면에 나타나는 밝은 색채와 생동하는 자연, 긍정적인 정서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으로 오랫동안 인용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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