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술잔 속에 피어난 오방색

[※ 편집자 주 = 문화체육관광부 집계 기준 2025년 K-콘텐츠 수출액은 149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K-콘텐츠와 K-컬처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향유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일상 속의 오방색
[신종근 제작 이미지]

어스름한 저녁,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려 마주하는 술잔은 한 폭의 그림처럼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투명한 유리잔에 내려앉은 액체의 빛깔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코끝을 스치는 향이나 혀끝에 닿는 맛보다 먼저 찾아오는 감각이다.

서양의 와인이 색과 질감으로 숙성의 깊이를 말하고 위스키가 호박빛으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낸다면, 한국의 전통술은 잔 속에 자연의 생명력과 우주의 질서를 함께 담아낸다.

우리 선조에게 술을 빚는 일은 알코올을 만드는 기술에 앞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대지에서 자란 곡물과 약재, 과실의 정수를 모아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철학적 실천에 가까웠다. 특히 여러 약재와 과실을 우려낸 우리술은 맛과 향은 물론 시각적 아름다움까지 품으며 한국 전통 미학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우리 전통 우주관을 상징하는 오방색(五方色)의 철학이 자리한다.

오방색은 음양오행 사상에서 나온 다섯 가지 기본색이다. 음과 양의 두 기운이 나무(木)·불(火)·흙(土)·쇠(金)·물(水)의 오행을 이루었다는 사유를 바탕으로, 각 기운에 색과 방위를 짝지었다. 청(靑)은 동쪽, 적(赤)은 남쪽, 황(黃)은 중앙, 백(白)은 서쪽, 흑(黑)은 북쪽을 뜻한다. 이 다섯 색을 오정색(五正色) 또는 오색(五色)이라 불렀다.

계절로는 청이 봄, 적이 여름, 백이 가을, 흑이 겨울이며, 황은 이 넷을 아우르는 중심에 놓였다. 옛사람들은 이 원리를 색에 그치지 않고 방위와 계절, 맛과 소리, 신체와 감정에까지 넓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가 동쪽 청룡·서쪽 백호·남쪽 주작·북쪽 현무로 방위를 지킨 것도, 궁궐과 사찰의 단청이 오방색을 기본으로 삼은 것도 같은 세계관에서 비롯됐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색의 질서가 술잔 안에서도 재현된다는 점이다. 우리술의 빛깔은 인공 색소가 아니라 대개 약재와 과실, 곡물에서 우러난 것이다. 다섯 방위의 색을 따라 우리술을 하나씩 짚어보자.

청(靑)의 색을 담은 솔송주와 죽력고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동방의 청색은 나무의 기운이자 봄과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이 푸른 기운에 어울리는 술로 전북 정읍의 죽력고를 꼽을 수 있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평양의 감홍로, 전주의 이강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은 술로, 대나무 진액이 들어가는 약소주다.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 받아낸 진액인 죽력에 생강·솔잎·계피 같은 약재를 더하고, 누룩과 찹쌀을 넣어 소줏고리에서 증류한다. 죽력을 얻는 과정이 며칠에 걸쳐 정성을 들여야 할 만큼 까다로워 예로부터 귀한 술로 대접받았다. 술빛은 대나무에서 온 연둣빛이 은은하게 감돈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전봉준이 모진 고문으로 기력이 쇠했을 때 죽력고 몇 잔에 기운을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야사 오하기문에 전하면서 몸을 보하는 명약주로 이름을 얻었다.

적(赤)의 색을 담은 오미자주, 복분자주, 산수유주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남방의 적색은 불의 기운이자 여름과 왕성한 양기를 뜻한다. 붉은빛을 대표하는 술은 전남 진도의 홍주다. 이름 자체가 '붉은 술'인 이 술은 맑게 내린 증류주에 지초 뿌리를 침출시켜 빚는데, 지초 뿌리에 든 자색 색소가 술을 붉게 물들인다. 척 보기에도 아름다운 붉은빛이 일품이며, 오래 두면 자색으로 짙어진다. 지초는 지치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동의보감은 그 뿌리에 해독·해열의 효능이 있다고 적었다.

홍주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빚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임금께 올리던 진상품 가운데 으뜸으로 여겨졌고 사대부가에서도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40도가 넘는 높은 도수에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뒷맛이 명주로 꼽히는 이유다. 주세법상 분류로는 증류주가 아니라 리큐르에 든다.

황(黃)의 색을 담은 한산소곡주, 금산 인삼주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중앙의 황색은 흙의 기운이자 우주의 중심을 뜻해 가장 고귀한 색으로 여겨졌고, 임금의 옷을 짓는 데 쓰였다. 이 노란빛에 어울리는 술로 황금주가 있다. 술 빛깔이 황금처럼 밝은 노란색을 띤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산가요록(山家要錄, 현재까지 밝혀진 우리나라 종합 농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식품조리서)·수운잡방·음식디미방 등의 고문헌에 실려 있으며 민가에 널리 보급된 서민의 술이었다. 노란 국화꽃을 넣어 빚는 국화주도 이 계열에 든다. 대전의 국화주는 노란 국화꽃을 써서 황화주라고도 불리며, 은은한 국화 향과 함께 맑은 노란빛이 술잔을 물들인다.

백(白)의 색을 담은 막걸리, 떠먹는 막걸리 이화주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서방의 백색은 쇠의 기운이자 가을과 수확을 상징한다. 흰빛을 대표하는 술은 이화주다. 배꽃이 필 무렵 하얀 쌀로 빚은 누룩을 써서 담근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색이 하얗고 죽처럼 걸쭉한 질감이라 물을 타서 떠먹듯 마셨다. 백설향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고운 흰빛이 특징이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겼다. 쌀과 누룩만으로 빚어 우윳빛에 가까운 순한 빛과 은근한 단맛을 낸다.

흑(黑)의 색을 담은 오디주, 검은콩 막걸리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북방의 흑색은 물의 기운이자 겨울을 뜻한다. 검은빛에 가까운 술로 흑미주가 있다. 흑미와 누룩으로 빚는 서울·경기 지방의 술로, 포도주 빛깔에 포도 향이 나며 단맛보다 신맛이 두드러진다. 검은쌀 껍질의 짙은 색소가 우러나 자줏빛이 감도는 깊은 빛을 낸다. 겨울밤 상차림에 화려함을 더하는 술이다.

이렇게 다섯 술을 나란히 놓고 보면, 잔 속 빛깔 하나하나가 방위와 계절, 오행의 기운과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조는 술을 빚으며 자연의 색을 그대로 잔에 옮겼고, 그 색에 우주의 질서를 담았다. 오늘 저녁 마주한 술잔의 빛깔을 다시 들여다본다면, 그 안에서 오방색의 철학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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