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탱크의 무한궤도 파편이 대통령 관람석까지 날아들었다"

"北 특수부대 침투, 미군 철수 문제로 1970년 안보위기"

"소총 등 기본병기도 제대로 못 만들다가 번개사업 도전"

"자주국방 위해 연구원들 사기진작 필요"…안동만 前 ADD 소장

[※ 편집자 주= 안동만 전(前)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 인터뷰는 내용이 많아 다섯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두 번째로 한국이 처음으로 무기를 만든 '번개 사업'을 주로 다뤘습니다. 지난 12일 송고한 첫 번째 기사는 안 전 소장의 성장 스토리와 한국군의 요격 미사일 등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3∼5번째 기사는 한국 지대지 미사일 '현무'와 국산 전투기, 함정 등의 위력을 다룰 예정입니다.]

2005년 9월 국정감사 당시 안동만 ADD 소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1971년 당시 한국은 소총, 기관총 등 기본 병기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병기의 기본 재료인 특수강도 제조하지 못했을 정도로 공업 여건이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ADD(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밤낮으로 일해서 기본 병기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한 달 만에 이뤄낸 '번개 사업'이었습니다,"

"1972년 4월 국산 대전차 지뢰의 성능을 시험할 때였습니다. 굉음과 함께 시험 대상 탱크의 바퀴인 무한궤도(캐터필러) 파편이 대통령 관람대까지 날아왔습니다. 군사령관 등은 놀라서 숨기에 바빴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꼿꼿이 서서 지켜본 뒤 성능이 좋다고 개발자들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는 안동만(77) 전(前)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인터뷰는 지난 6월 8일을 시작으로 네 차례에 걸쳐 대전시 한국무기체계안전협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안 전 소장은 이 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자주국방 도전은 1971년 말 '번개 사업'으로 시작됐다"면서 "설계 도면이 없어서 미군의 소총, 기관총, 박격포, 대전차 지뢰 등을 해부한 뒤 다시 설계 도면을 그리는 역설계 방식으로 무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 노력이 토대가 돼서 지금은 대부분의 군 장비를 국산화했다"면서 "방산 수출에서도 한국은 세계적 강국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그는 "좀 더 높은 수준의 국방력을 위해서는 무기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사람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북고 앨범 속의 안동만 전 소장
[본인 제공]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안 전 소장은 경북중, 경북고, 서울대 항공공학과를 거쳐 미국 노스럽대에서 항공공학 석사학위, 영국 크랜필드대에서 같은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ADD에 입사한 그는 1990년 항공기술 부장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군용 항공기인 KT-1을 개발했다. 1995년에는 대함유도무기체계 부장이 돼서 함대함 유도무기 '해성', 국내 최초의 순항유도탄 '현무3' 등을 개발했다.

이어 2000년 항공기·유도무기개발본부장, 2003년 국방부 연구개발관, 2005년부터 3년간 ADD 소장으로 일했다. 그는 이때 장거리 전략무기, 철매2 대공 유도무기, 다목적 헬기, 무인 항공기, 군사용 위성 등을 개발했다. 국방부 연구개발관과 ADD 소장 시절에는 국방 위성 개발 등 개방적인 국방 R&D를 추진했다.

대통령 암살을 위해 침투했던 북한 특수부대원 김신조.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 자하문까지 진출했다. 이 중 29명이 사살됐고 김신조는 생포됐으며 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연합뉴스 사진]

다음은 인터뷰 2차 기사 질문-답변

--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의 창설 배경은.

▲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특수부대원 31명을 남한에 침투시킨 ' 1·21 사태'가 발생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있었다. 그다음 해인 1969년 7월 25일에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취지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당시는 주한 미군 전체가 철수하면 북한의 재침략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미 북한은 1970년을 적화통일의 원년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한국 정부가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전체 주한미군의 철수는 없었다. 그러나 2만명 규모의 1개 사단(7사단)이 한국을 떠났다.

-- 당시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열세였나.

▲ 당시 북한군의 병력은 예비군 성격의 노농적위대까지 포함하면 한국군의 2∼3배에 달했다. 그들의 무기도 탱크, 장갑차, 전투기, 고속정 등에서 한국보다 훨씬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규군과 갓 창설된 예비군이 사용할 병기의 국산화는 시급하고 필수적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 로고
[연합뉴스 사진]

-- 그래서 ADD가 창설됐나.

▲ 당시의 안보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병기의 국산화를 위해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같은 국책연구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국방부는 신응균 KIST 감사(예비역 소장)를 중심으로 창설 준비에 들어가도록 했다. 이를 위해 각 군 사관학교의 박사 교관들도 차출했다. 1970년 8월 6일에는 국방과학연구소 설치에 대한 대통령령이 공포됐고, 1970년 12월 31일에는 국방과학연구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어 1971년 1월 이사회가 구성되면서 ADD는 공식적인 연구개발 활동을 시작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영어로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라고 한다. Agency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소이지만 정부 기관의 성격이 강하다

-- ADD가 1971년 말 시작한 번개 사업의 내용은 무엇인가.

▲ 이 사업은 1971년 1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의 구두 지시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2 수석에게 "지금 안보 상황이 초비상 상태이므로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60mm 박격포를 포함한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전달받은 ADD는 곧바로 기본 병기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시제품 제작에 돌입했다. 그건 M1 소총(2정), 카빈소총(10정), 기관총(10정), 박격포(12문), 수류탄(300발), 지뢰(40발), 로켓 발사기(4문) 등이었다.

-- 당시에는 한국이 기본 병기조차 못 만들고 있었나.

▲ 한국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병기가 별로 없었다. 소총, 박격포 같은 기본적인 것도 제조하지 못했다. 철모조차 제대로 만들기 어려웠다. 거의 모든 것을 미군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미군 1개 사단이 보유한 병기들의 양과 질은 한국군 1개 군단보다 훨씬 나았다고 한다

번개 사업 당시 제조한 M2 카빈 소총 시제품
[전쟁기념관 제공]

-- 당시 기본 병기 제조를 왜 번개 사업이라고 했나.

▲ 1971년 11월 17일 ADD와 청와대 오원철 수석은 연말까지 국산 병기를 만들기로 했다.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 7종 12개 품목이었다. 연말까지는 45일밖에 안 남은 시점이었다. 게다가 오 수석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전에 시제품을 청와대에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시제품 시험발사를 해봐서 결함이 발견되면 보완하고, 이듬해 3월 1일까지 2차 시제품을 만들자고 했다. 한마디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이었다. ADD 개발자들은 자연스럽게 '번개 사업'이라고 불렀다.

-- 이 번개 사업은 성공했나.

▲ ADD는 한 달 만인 12월 16일 시제품을 청와대에 가져가 보여줬다. 박 대통령은 병기들을 살펴보고 "하면 되네"라고 하면서 "우리가 만들어 낸 이 병기들은 이번 크리스마스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이처럼 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71년 12월 24일에는 태릉 사격장과 해운대 탄약창 사격장에서 시제품의 시험 사격도 실시했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ADD 구성원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것이 1차 번개 사업이었다.

-- 번개 사업 당시 개발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을 듯하다.

▲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갖다 놓고 밤낮으로 일했다고 한다. 당시는 공업 여건이 열악했다. 총, 박격포 등 병기에 필요한 특수강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만드는 제강 공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기 도면도 없어서 역설계 방식으로 제조해야 했다. 군부대에서 미국산 무기를 빌려와서 분해하고는 기본적인 측정 기구를 사용해 스케치 도면을 그리는 식이었다. 각종 공작 장비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 당시에 재료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청계천 시장은 한국의 원자재 창고였다. 모든 고물류의 집합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고물이 선반으로 가공돼서 재활용품으로 바뀌었다. 번개 사업에 필요한 일부 원자재도 그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이 불하하거나 폐기 처분한 장비와 공구가 거기에 있었다. 그곳의 철공소들에서는 강철을 깎고 다듬는 작업도 가능했다.

번개사업 관람대의 박정희
1972년 4월 3일 번개사업 종합 시범 사격행사에서 박 대통령이 쌍안경으로 무기의 성능을 관찰하고 있다. [안동만 전 소장 제공]

-- 번개 사업 에피소드가 있다면.

▲ 1차에 이어 2차 번개 사업이 1972년 1월부터 3월까지 진행됐다. 2차는 예비군에게 지급할 병기를 양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직후인 4월 3일에는 번개 사업으로 만든 병기들에 대한 '종합 시범 사격 행사'가 있었다. 그중에 대전차 지뢰도 있었다. 개발자들은 대전차 지뢰를 깔아놓고 전차를 대상으로 시험을 했다. 폭발음이 크게 울렸고, 전차의 캐터필러(무한궤도) 파편이 관람대까지 날아들었다. 상당히 먼 거리였다.

-- 파편이 멀리 날아온 이유는.

▲ 대전자 지뢰를 만든 사람은 김모 박사(해군 중령)였다. 그분은 혹시 터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을 하다가 지뢰를 1개가 아닌 2개나 깔아놨다고 한다. 그래서 파편이 먼 거리까지 날아온 것이다. 파편이 주변에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박 대통령은 침착하게 관람하고 그 우수한 성능에 대해 칭찬했다고 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담대함을 보인 것이다.

박격포 사격 훈련하는 장병들
2022년 8월 24일 경기도 파주시 사격장에서 실시된 육군 사격훈련에서 장병이 4.2인치 박격포 를 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 박격포가 안 나갔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 ADD는 미국산을 모방해서 60㎜ 박격포를 만들었다. 그런데 시험 사격에서 포탄이 날아가다 중도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연구원들은 밤잠을 설쳐가면서 그 원인을 찾았다. 역설계 도면과 시제품을 일일이 비교하고 분석했다. 그 결과 시제품 포신이 미국산보다 1.5㎝ 짧다는 것을 확인했다. 1인치를 2.54㎝로 환산해야 하는데 2.5㎝로 하고 0.04㎝를 무시한 결과였다.

-- 박격포 포신의 길이가 중요한가.

▲ 그 포신은 일종의 로켓 탄통이다. 그 속에서 화약이 터지면 압력이 생기는데, 그 힘이 포탄을 밀어낸다. 이것이 발사의 원리다. 포신이 몇㎝ 짧으면 압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발사되므로 총구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거리도 짧아진다. 총구 속도는 총구에서 탄이 나가는 그 순간의 속도를 말한다. 물론 포신이 너무 길어도 문제가 된다.

육군박물관에 있는 6.25 전쟁기 철모
[연합뉴스 사진]

-- 군인용 헬멧도 번개 사업으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 그 당시 한국은 철모도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군인들이 미군용 철모를 사용했다. 그런데 미국은 1960년대 우주로 가는 아폴로 계획을 수행하면서 다양한 고강도 소재를 개발했다. 제한된 에너지로 달나라에 가려면 우주선 전체 중량을 1g이라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1971년 3월 ADD 물자 개발 실장인 한필순 박사(1933∼2015년)는 이런 고강도 신소재로 경량 헬멧을 만들었다. 나일론 섬유와 합성수지로 된 복합재를 사용한 헬멧이었다. 한 박사는 공군 중령 출신으로 나중에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을 지낸 분이다.

-- 만들어놓고 보니 그 헬멧이 튼튼했나.

▲ 한 박사는 쇠망치로 강하게 충격을 가해보고, 그 위로 지프차를 지나가게 하면서 강도를 시험했다. 그렇게 만든 헬멧을 생산했는데, 군 장교들이 먼저 갖겠다고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철모보다 훨씬 가볍고 튼튼했기 때문이다.

-- 한국형 수류탄도 만들었다고 하던데.

▲ 당시 한국군이 보유 중인 수류탄은 미군용이었다. 고구마처럼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한국 군인한테는 좀 무거웠다고 한다. 그래서 한필순 박사가 한국형 수류탄을 개발하는 연구도 진행했다. 이때 워커힐호텔 앞 한강 자갈밭에서 '휴먼 엔지니어링(인간 공학)'을 적용한 개발 시험이 있었다고 한다.

-- 휴먼 엔지니어링을 적용했다니 무슨 이야기인가.

▲ 자갈밭에서 연구원들과 함께 다양한 돌멩이를 던져봤다고 한다. 무게, 크기, 모양 별로 돌멩이들을 구해놓고 어떤 돌멩이가 가장 멀리 나가는지, 어떤 것이 팔에 힘의 부담을 덜 주는지 분석했다는 것이다. 던지는 사람의 키와 몸무게도 고려해서 측정했다고 한다. 다양한 인간의 특성을 감안해서 최적의 답을 얻는 것이 인간 공학인데, 이를 처음으로 수류탄 개발에 적용해 본 것이다. 이때 서울공대와 서울사대 체육과 교수들의 도움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동그란 형태의 380g 짜리 한국형 수류탄이 처음으로 탄생했다.

이석표 전 청와대 비서관 순직 위령비
국산 벌컨포 시험을 감독하다 순직한 이석표 전 청와대 비서관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 이전 제막식이 2009년 4월 1일 경기도 연천군 국방과학연구소 종합시험단 총포탄약시험장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사진]

-- 무기 개발 자체는 매우 어려운 일인 듯하다.

▲ 힘들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번개 사업 한참 후인 1978년이었다. ADD가 개발한 벌컨포를 테스트하는 중이었다. 국산 탄을 미국 포에 넣고 쏘아 봤더니 잘 나갔다. 국산 포에 미국 탄을 장전하고 발사했더니 역시 문제가 없었다. 국산 탄과 국산 포의 성능이 각각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 국산 포에 국산 탄을 넣고 발사했더니 나가지 않았다. 개발자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탄창을 열었는데, 그때 갑자기 탄알이 튀어나왔다.

-- 피해자가 있었나.

▲ 옆에서 탄창을 보던 당시 청와대 이석표 비서관이 숨졌다. 사고원인을 분석한 결과, 수입한 뇌관(화약 폭발 스위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렇게 무기 개발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실수했다고 해서 감사를 벌이고 처벌하면 아무도 도전적인 연구개발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무기 개발자들에 대한 격려와 사기진작책이 필요한 이유다.

(인터뷰 2차 기사 질문-답변 끝)

최초의 국산 지대지 미사일 '백곰'의 발사 장면
[ '백곰, 도전과 승리의 기록' 책 사진 캡처]

<인터뷰 1차 기사 요약>

[삶] "하늘에서 바늘로 바늘 맞추는격…한국 미사일, 세계 톱 수준"(6월12일)

이번 미국-이란 전쟁에서 UAE가 보여준 천궁-Ⅱ의 방어율 94∼96%는 정말로 뛰어난 수준이다. 현재 대공 방어 미사일 시스템이 가능한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한국 정도다. 그런데 이번 전쟁에서 중국산 대공 무기와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보다 한국의 천궁-Ⅱ가 낫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대공 미사일은 톱 클래스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지대지 미사일을 만드는 '백곰사업'은 1971년 12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친필 메모를 통해 1단계로 1975년까지 200㎞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백곰사업은 1978년 9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앞으로 자주국방 수준을 더욱 끌어올리고, 방산수출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도전했다가 실패해도 용인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성과에 대해 제대로 보상해줘야 한다.

현재는 관료주의가 문제다. 국회가 수많은 법을 만들고, 정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을 만드는데, 이게 너무 많다. 이러니 실패하면 이런 규정을 근거로 감사원, 방위사업청 감독관실, 군 수사기관, 검찰, 경찰 등의 수사와 감사가 뒤따른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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