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함께 본다…강릉 작업 들고 방콕을 누빈 한국 예술가들

15일 오후 방콕 쿤스트할레의 전시 개막 행사에서 선보인 전통연희집단 푸너리의 강릉단오굿 연주 공연 장면. 푸너리 연주자들은 특별한 가설무대 없이 불탄 흔적 남은 건물 사이를 돌며 징과 꽹과리, 북의 울림을 격정적으로 쏟아냈다. 공연 막바지에 전시장 바닥에 놓인 여러 색깔의 종이꽃들 앞에서 연주자들이 일어서서 장단을 갈무리하는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

“전통은 타고 남은 재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태운 불꽃을 보존하는 것이다.”

우주와 인간 심연을 파헤친 교향곡을 작곡한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경구가 전시장 벽의 설명 패널 서두에 영어 문장으로 붙어있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타이 수도 방콕의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만난 현대미술전시관 방콕 쿤스트할레의 내부는 인상적이었다. 개관한 지 2년 됐다는 건물 천장과 벽에는 10여년 전 화재로 불타고 그슬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작품들의 배경이 되었다. 말러의 문장이 적힌 패널 벽 안쪽으로는 타이 소수민족이 지은 전통 가옥과 농경의 산물인 짚단들을 현대미술의 감각으로 재구성한 젊은 현지 작가의 설치 작품이 존재감을 빛냈다.

15일 오후 방콕 쿤스트할레의 전시 개막 행사에서 선보인 전통연희집단 푸너리의 강릉단오굿 연주 공연 장면. 푸너리 연주자들은 특별한 가설무대 없이 불탄 흔적이 남은 건물 사이를 돌며 징과 꽹과리, 북의 울림을 격정적으로 쏟아냈다. 노형석 기자

이날 오후 이 공간에 한국 강릉에서 온 전통연희집단 푸너리의 연주자 4명이 징과 꽹과리, 장구를 치며 격렬한 소리 난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의 음악과 노래, 춤 등을 30분 분량으로 압축한 산조풍의 타악 리듬으로 풀어냈다. 액운을 쫓고 산 자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열띤 타악의 울림은 타이 젊은 시각예술가들이 펼쳐 놓은 전통 재해석 작업 위로 울리며 스며들어갔다.

15일 오후 방콕 쿤스트할레 2층 공간에서 열린 전시 설명회 현장. 3회 강릉아트페스티벌에 나왔던 전시 출품작들에 대해 박소희 디렉터가 소개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푸너리의 타악 퍼포먼스는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CIAF)을 운영해온 파마리서치문화재단과 방콕 쿤스트할레의 카오야이 아트재단이 함께 기획한 국제협력전 ‘경계에서 함께 보기’(Watching Together at the Boundary)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다. 다음달 9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는 지난해 3회 강릉페스티벌에서 관객과 만났던 한국·타이 현대 작가들의 강릉 현장 제작 작품들을 방콕의 도시 공간 맥락에 맞게 재구성한 미술 교류 프로젝트다. 첫날 푸너리의 개막 퍼포먼스가 무속임에도 삶에 대한 낙관과 희망, 축제의 즐거움을 담고 있는 울림이라는 점에 타이 관객들은 한껏 몰입하며 열광하는 모습이었다. 연초 물을 뿌리며 한해의 행운을 기원하는 타이 전통 축제 송크란을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젊은 화가 라밀(27)은 “푸껫 등 타이의 지역에서 비슷한 느낌의 퍼포먼스와 제의를 본 기억이 나서 흥미롭게 지켜봤다. 각 지역의 역사나 지리는 달라도 예술에 담긴 삶의 이야기나 정서는 통하는 게 있고 소중한 교류의 끈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주요 출품작 중 하나인 정연두 작가의 단채널 영상 ‘싱코페이션 #5\

2층 전시 공간에서는 강릉 혹은 타이의 지역사와 삶 이야기를 은유적·상징적으로 담아낸 고등어, 이양희, 아라야 라스잠리안숙, 정연두, 홍이현숙 작가의 작품들을 단채널 영상으로 선보였다. 특히 직접 현장에 찾아와 박소희 강릉페스티벌 디렉터와 대담을 진행한 정연두 작가의 작품들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단오제에서 주민들의 쌀을 모아 신성한 술 신주를 빚는 장면, 산불의 흔적 등을 2대의 피아노 연주 타건 장면과 대비시킨 자신의 시청각 영상을 가리키면서 “자연의 난관을 딛고 삶을 잇기 위한 의지를 강릉 단오제 현장과 주민들의 삶에서 느껴 그걸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정 작가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과서를 찍던 곳이 불타고 남은 방콕의 전시장에서 제 작업을 낯설고 새로운 의미로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경계에서 함께 보기’전이 열린 방콕 쿤스트할레의 외관. 원래 교과서 등을 내던 출판사·인쇄소가 들어섰다가 2000년대 초반 불이 나면서 방치됐던 건물을 2024년 1월 현대미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노형석 기자

방콕 쿤스트할레는 원도심 차이나타운 거리에 자리한 3개 동의 복합문화공간 시설이다. 197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인데, 가장 높은 7층짜리 본전시장 비(B)동은 교과서 인쇄공장이 있던 곳으로, 2001년 화재 이후 방치됐던 곳을 타이 굴지의 기업 시피(CP)그룹 카오야이 아트재단에서 인수해 2024년 1월 현대미술 공간으로 개관하면서 타이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창작 발표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박필연 파마재단 이사장은 “전시 제목처럼 경계를 넘어 강릉과 방콕의 현대미술 현장이 서로 만나면서 지속적으로 교류를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계에서 함께 보기’전 포스터. 파마리서치문화재단 제공

방콕/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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