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탐정…상실의 궤적이 단서 [..txt]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헤매며

‘잃어버린 시간’으로 ‘나’를 다시 쓰기

프랑스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81). “파악하기 가장 어려운 인간의 운명을 환기시키고 나치 점령기의 삶을 드러낸 기억의 예술”이라는 평가와 함께 201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신유진의 프랑스 문학 식탁

문학의 눈동자는 뒤를 향한다. 소재와 주제가 무엇이든 그 안에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감정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문학은 그렇다. 앞만 보며 나아가라는 세상과 어쩔 수 없이 불화하는 이 이야기들을 두고, 누군가는 노스탤지어에 취한 감상주의자들의 것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나 역시 때때로 궁금해진다. 파트릭 모디아노라면, 과거를 편애하는 이 이야기들의 이유와 쓸모를 말해주지 않을까.

모든 작가는 평생 하나의 이야기를 쓴다고 한다. 글쓰기란 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품는 일이고, 작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질문이 머무는 집으로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디아노의 질문은 기억과 과거, 부재와 망각이다. 그래서 그의 고개와 어깨는 언제나 뒤를 향한다. 그가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저 뒤편에 있기 때문이다.

모디아노는 나치 점령기 직후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나치 부역자들과 결탁해 암시장을 전전하며 생존했고, 그 대가로 해방 후 쫓기는 신세로 살았다. 배우였던 어머니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아들을 방치했다. 부모의 방임과 주변 어른들의 수상한 비밀 속에서 모디아노는 언제든 자신이 흔적도 없이 증발할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며 유년기를 보냈다. 유일한 위안이었던 남동생마저 11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세계는 완전히 안갯속에 갇혀버렸다. 노년이 된 그가 여전히 과거의 파리로 돌아가 오래된 주소록을 뒤적이고 유령 같은 인물들을 그려내는 것은 그의 내면에 아직도 걷히지 않은 그 안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안에서 길을 잃는 대신 희미해진 것들을 읽는 법을 배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l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2010)

그의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모디아노의 세계를 관통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기억상실증에 걸린 탐정 기 롤랑은 이름, 국적, 과거가 지워진 존재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임시 신분증과 신원 미상의 인물들과 찍힌 사진 몇장뿐이다. 그는 나치 점령기라는 거대한 암흑이 앗아가버린 진짜 ‘나’를 찾기 위해 파리의 골목을 서성인다. 자기 자신을 추적하는 탐정이라니, 얼마나 모순적인가.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도 기 롤랑은 자신의 기억을 완성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를 통해 ‘나’라는 존재가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의 합이 아니라, 내가 통과해 온 상실의 궤적임을 배운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실패의 경험, 두고 온 청춘, 잃어버린 기억.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의 구멍을 간직하며 살고, 역설적이게도 그 텅 빈 곳이 결국 ‘나’라는 인간의 고유한 윤곽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기 롤랑이 기억을 추적하는 행위는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아 구멍을 메우려는 수고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정확히 마주하려는 확인이다. 나의 상실과 고독은 그 누구의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에 그 부재를 아는 것이 곧 나를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조각을 그러모아도 모디아노의 인물은 마지막까지 선명해지지 않는다. 완전히 복원할 수 있는 과거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을 이정표 삼아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없지만, 모디아노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그 안갯속을 다시 걸어 들어간다. 깨진 기억의 도자기를 온전하게 되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매번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붙이고 메우기를 반복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평생에 걸친 복원의 의식인 셈이다.

모디아노는 “내가 누볐던 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을 되찾기 위해 글을 쓴다”고 고백했다. 돌아갈 수 없는 물리적 공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무력한 퇴행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풍경 위로,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흔적을 겹쳐 보는 행위다. 이를 위해 작가가 사용하는 장치는 ‘구체적인 주소’다. 모든 기억이 흐릿할 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캉바세레스가 10번지’ ‘오스테를리츠 강변로 9번지’ 같은 정확한 주소는 기억이라는 허상의 영토에서 유일하게 손에 잡히는 완강한 단서가 된다. 오늘날 자동차 경적과 소음으로 가득한 그 구체적인 주소 위로, 1940년대 나치 점령기의 서늘한 냉기가 겹쳐 흐를 때 시간은 잠시 정지한다. 현대식 상점의 유리창 너머로, 수십년 전 바로 그 번지수를 불안하게 서성이던 부서진 운명들의 실루엣이 포개어진다. 모디아노의 세계에서 과거는 빛바랜 추억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 위를 완강하게 뚫고 나와 지금의 ‘나’를 집요하게 흔드는 힘이다. 그의 인물이 자기 자신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현재의 주소 위로 과거의 발자국을 포갤 때, 우리는 옛 글귀를 긁어내고 그 위에 새 글을 덧쓴 고대 양피지처럼 삶이 조금씩 다시 쓰이는 것을 목격한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과거라는 바탕 위에 오늘의 걸음을 부지런히 덧쓰는 이 반복적인 행위는 결국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무늬와 두께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문학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산다. 문학은 망각의 무덤에 묻힌 실루엣들을 구해내고, 상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애틋한 마음으로 다시 응시하게 한다. 그리고 그 위에 현재의 삶을 덧써 내려가게 한다. 우리가 모디아노가 그리는 1940년대 파리에서, 그곳을 헤매는 실루엣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야 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잃은 것들, 언젠가 나 또한 잃게 될 것을 미리 앓는다. 그러니 이것은 돌아보기인가 내다보기인가. 분명한 것은 시선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든,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애틋하게 쥐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나였고, 또 내가 될 이 모든 것을.

신유진 작가·번역가

신유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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