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나면 붓 드는 사람들 …“그린다 생각하니 새롭게 읽혔죠”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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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수 작가, 10년간 책 읽고 영감 그려와

저자·등장인물…공감 담아낸 독후화 전시도

“추상적 생각 구체화해 깊이있는 독서 경험

책을 읽고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독후화’는 독자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맨 위 왼쪽부터 소설 ‘거짓말이다’를 읽은 뒤 천지수 작가가 그린 독후화 ‘함께’, 콰야 작가가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집 ‘우리가 시를 처음 쓴다면 그건 분명 윤동주일 거야’를 위해 그린 독후화. 아래 왼쪽부터 천지수 작가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그린 독후화 ‘데미안’,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영감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 의식’, ‘밥 딜런: 아무도 나처럼 노래하지 않았다’를 읽고 그린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콰야 작가의 ‘구의 증명’ 독후화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서’. 천지수·콰야·한빛라이프·밀리의 서재 제공,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

천지수 작가는 왼손잡이다.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데, 어릴 적 책을 읽다 보면 오른손에 있던 연필이 어느새 왼손에 쥐여 있곤 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이미지나 인상적인 장면, 생각의 실마리들을 여백에 빼곡히 그려 넣은 까닭이다. 그 작고 소박한 그림들이 천 작가의 ‘페인팅 북리뷰’(독후화) 습작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탈리아 유학 시절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주제로 개인전을 연 것이 시작이었을까.

천 작가는 2016년 김성신 출판평론가에게 “책을 읽고 난 뒤의 영감을 그림으로 그리고 창작 과정을 글로 쓰는 재미있는 실험(페인팅 북리뷰 프로젝트)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낯설거나 두렵긴커녕 매우 설렜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경력 단절 화가’로 살아가던 그가 “보채는 아이를 뒤로하고 말라붙은 붓끝에 다시 물감을 찍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함께’(72.7×60.6㎝, 캔버스에 오일, 2016)는 천 작가의 첫 페인팅 북리뷰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주검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 이야기를 다룬 김탁환 작가의 장편소설 ‘거짓말이다’(북스피어 펴냄, 2016)를 읽고 그렸다. “김관홍 잠수사가 아이들을 뭍으로 데려올 때 온몸으로 꼬옥 안아 올렸다는데,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하며 읽다가 그 슬픔과 고통에 공명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의 포옹이 아이들이 살아왔던 시간, 추억, 존재 자체를 껴안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장을 안아주는 포옹이라고 할까요.” 따뜻하고 밝은 불빛에 둘러싸인 수많은 ‘포옹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별처럼 반짝이는 작품 ‘함께’에는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 안타깝게 숨진 김관홍 잠수사, 그리고 상처받은 모두를 진심으로 껴안아 위로하고픈 작가의 진심이 담겨 있다.

헤르만 헤세의 동명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데미안’(100×80.5㎝, 캔버스에 오일, 2019)에선 산맥처럼 크고 굳건해질 날개를 벼리며 알을 깨고 비상하려는 아이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원작 소설의 팬인 천 작가는 ‘알을 깬다’는 의미가 무언지 오래 사유했는데, 외부 장애물을 부수기보다 ‘내 마음속 닫힌 문을 여는 것’에 가깝다고 결론지었다. 그림에 작은 문을 그려둔 이유이자, 작가가 ‘데미안’의 작업 과정에 대해 “꿈속의 데미안을 그리면서 나 역시 나를 열고 들어갈 열쇠를 찾았다”(‘책 읽는 아틀리에’ 58쪽)고 쓴 이유다.

천지수 작가의 10년간 작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 ‘마리네일리아-틈새의 상상’(6월14일까지, 경기도서관) 현장.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탱크가 팝콘을, 군인의 총구가 마시멜로를 쏘는 달콤한 세상, 아이스크림이 핵폭탄처럼 터지는 분홍분홍한 평화의 세계 ‘노킹 온 헤븐스 도어’(61×72.5㎝, 캔버스에 오일, 2016)는 ‘밥 딜런: 아무도 나처럼 노래하지 않았다’(구자형 지음, 북바이북 펴냄, 2016)를 읽고 그렸다. 제주 4·3 항쟁을 다룬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에서 영감받은 ‘작별하지 않는 의식’(72.5×91㎝, 캔버스에 아크릴, 2024)에선, 나무에서 폭설처럼 쏟아지는 눈송이가 희생자들과 참혹한 고통을 포근히 덮어 위무한다.

‘함께’를 시작으로 4주에 한편씩 5년간 ‘페인팅 북리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천 작가는 “이전의 독서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책의 전혀 다른 면모”들을 보기 시작했다. “같은 한글, 같은 활자인데, ‘그리기 위해 읽는다’는 자세 하나가 달라지니까 텍스트가 다른 차원으로 열렸어요. 때로는 작가가 펼쳐놓은 공간이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듯 보이고, 때로는 작가의 표정이나 몸짓이 떠올랐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미지들이 책 속에 숨어 있었어요. 텍스트 사이, 상상력이 피어날 수 있는 ‘틈’에 주목하니 새로운 우주의 문이 열린 거죠.”

‘이야기의 숲-도서관 환타지’(맨 왼쪽)를 비롯한 ‘도서관 시리즈’를 배경으로, 개브리얼 제빈의 ‘섬에 있는 서점’(문학동네, 2017)의 독후화 ‘내 마음의 디저트섬’을 소개하는 천지수 작가.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텍스트의 매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힘에 있다”고, 천 작가는 말한다. 소설 ‘거짓말이다’를 읽고 세월호 잠수사 김관홍의 ‘포옹’을 그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바닷속에서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가슴에 안아 올리는 장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가치를 캔버스 위에 꾸역꾸역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텍스트의 매력에 빠져 5년간 쉼 없이 읽고 그리고 쓴 결과물을 엮어 ‘책 읽는 아틀리에’(천년의상상 펴냄, 2021)를 펴냈고, 그 후로도 멈추지 않고 “트레이닝하듯” 페인팅 북리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1년 전부터는 무한한 상상의 공간인 도서관에 천착해 ‘도서관 판타지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오는 14일까지 경기도서관에서 열리는 전시 ‘마지네일리아―틈새의 상상’에선 지난 10년간 텍스트와 그림을 자유롭게 넘나든 천 작가의 즐거운 실험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시 제목인 ‘마지네일리아’는 책이나 문서 여백에 기록된 메모, 주석, 삽화를 뜻한다.

중세 수도사들이 필사본 여백에 메모와 삽화를 남긴 것에서 기원한 ‘마지네일리아’는 아주 오래되고 보편적인 독후활동이라 할 수 있다. 천 작가에게 페인팅 북리뷰 프로젝트를 처음 권유한 김성신 출판평론가는 메모하기, 필사하기, 독후감 쓰기, 독후화 그리기와 같은 독후활동이 “읽기의 부속물이 아니라 읽기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읽기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미완성”이며 “읽은 것이 내 안에서 발효되어 다시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때 비로소 읽기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텍스트를 압도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출판평론가로서 ‘문자와 이미지가 지금보다 더 깊고 넓게 만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화가에게 읽기와 쓰기라는 출판의 문법을 입히는” 실험을 제안했던 그는 천 작가의 작업을 10년간 지켜보며 “읽기의 연장으로서 독후화”가 가진 강점을 확인했다.

“글은 논리의 언어고 그림은 감각의 언어죠.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무엇을 이해했는가’가 남지만, 그림을 그리면 ‘무엇을 느꼈는가’가 남습니다. 천 작가의 작업을 지켜보며 확신하게 된 것 하나는 독후화를 그린 책은 잊지 않는다는 거예요. 손이 기억하기 때문이죠.”

누구나 손쉽게 이미지를 만들고 공유하는 만큼, 시각적인 독후 활동을 즐기는 독자들이 늘고 있는 요즘이다. 인상 깊었던 글귀를 디지털로 필사(필스타그램)하거나 한컷 만화·일러스트 등으로 그려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책 표지를 재창작하거나 간단한 굿즈를 만들어 뽐내기도 한다.

콰야 작가가 책과 독서를 모티브로 그린 ‘책을 읽는 듯 보이는 소년’. 콰야 제공

자신의 일상과 사유를 일기 쓰듯 편안하게 그려 인스타그램(@qwaya_)으로 대중과 공유하는 콰야 작가는 책과 독서를 오브제 삼은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의 작품 속 책은 “때론 탐구의 매체, 때론 하기 싫은 일(공부)이나 기억”을 은유한다. 책을 읽으며 조용히, 그러나 조금은 고집스럽게 탐구하는 소년의 모습에 매혹된 출판사들이 앞다퉈 협업을 제안했다.

김희정 한빛라이프 편집자는 “필사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그림과 예쁜 손글씨가 어우러진 필사집을 소장하는 데 매력을 느낄 거라 생각해 콰야 작가에게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집을 위한 독후화를 의뢰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시를 처음 쓴다면 그건 분명 윤동주일 거야’(윤동주 글, 콰야 그림, 윤한빈 손글씨, 한빛라이프, 2021) 속 콰야의 그림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운’ 감수성 충만한 시인이 아니라 오늘의 숙제에 내일을 고민하는 소년의 모습이라 더 정겹고 어쩐지 눈물겹다. 콰야 작가는 또 “ 디지털을 활용해 책과 예술작품을 결합한 공감각적 독서 경험을 선사하고자 ”( 조재원 kt밀리의서재 매니저 ) 기획한 ‘ 아트형 오브제북 프로젝트 ’ 에 참여해 ‘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 유영광 지음 , 클레이하우스 펴냄 , 2023) 의 독후화 ‘ 어느 장맛날의 꿈 ’(100×80,㎝, 캔버스에 오일 , 2023) 과 ‘ 구의 증명 ’(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펴냄 , 2023) 의 독후화 ‘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서 ’(100×80㎝, 캔버스에 오일 , 2023) 도 선보였다 .

콰야 작가가 그린 ‘쌓인 책들 위에서’. 콰야 제공

콰야 작가는 독후화 그리기의 매력이 “텍스트에 담긴 추상적인 생각을 구상의 형태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더 깊이 있고 새로운 독서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드로잉 노하우를 담은 ‘콰야의 오일파스텔 클래스’(비타북스 펴냄, 2022)를 펴내기도 한 그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책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를 좋아하는 색으로 슥슥 그리면 된다”고 했다. 최근 꾸린 독서모임 참가자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며 독후화도 그려볼 예정인데,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이나 펜을 가지고 가볍게 ‘낙서일기’를 써보는 식으로 부담 없이 가볍게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콰야 작가의 독서모임은 7월1일 첫 만남을 앞두고 참가자를 모집 중이다.

독후화 그리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 천지수 작가는 “ 누구나 자신만의 페인팅 북리뷰를 할 수 있다 ” 며 “ 중요한 것은 그림 실력이 아니라 읽은 뒤 내 안에 남은 것을 정직하게 꺼낼 수 있는 용기 ” 라고 말한다 . “ 잘 그리지 않아도 , 책을 읽는 동안 자기 안에서 일어난 떨림을 손으로 옮기는 것 자체가 하나의 마지네일리아 , 자신만의 틈새의 기록 ” 이라는 것이다 . 나아가 “ 독후화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 고 조언했다 . “ 에이아이 (AI) 가 몇초 만에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 한 권의 책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기록하는 행위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기 때문 ” 이다 .

이미경 객원기자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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