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제명’ 룰이 필요한 이유 [김은식의 이사만루]

지난 7일 부산 북구의 선거사무소에서 인터뷰 중인 한동훈 6·3 국회의원 부산 북갑 보궐선거 무소속 후보. 2010년 10월 정형근 당시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서울 마포구 국민건강보험공단 회의실에서 열린 국정 감사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연합뉴스

김은식 | 작가

야구에서는 번호를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기념한다. 부상으로 잠시 떠난 동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헬멧에 그 선수의 등번호를 적어 넣고, 존경하는 선배를 닮고 싶다는 뜻을 담아 등번호를 물려받는다. 그래서 한때 왼손 강타자들이 장훈의 10번을 달았고 많은 왼손 투수들이 톰 글래빈과 이상훈의 47번을, 유격수들이 김재박의 7번을 달고 뛴다.

구단이나 리그가 좀 더 오래, 분명하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선수의 번호를 아무도 달 수 없도록 비워두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최동원, 선동열을 비롯한 ‘레전드’ 20여명의 등번호가 각 구단에서 ‘영구결번’ 됐고, 메이저리그에서는 흑인 선수들도 함께 뛰는 시대를 개척한 재키 로빈슨의 42번을 모든 구단에서 사용할 수 없다.

그 반대의 의미로 완전한 절연을 선언하는 ‘영구제명’이 있다. 대상이 되면 리그에 속한 모든 구단은 물론, 관련 영역에서 어떤 역할도 맡을 수 없으며 모든 예우가 중단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록에 따로 표시해서 구분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영구제명된 사유의 대부분은 마약, 성범죄 같은 중대한 범죄거나 승부조작이었다. 정당한 경쟁이라는 스포츠의 본질, 혹은 대중의 사랑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프로 스포츠의 조건을 위협한 일들이다. 야구는 그 존재 이유를 잠식하는 일탈과 냉정하게 결별함으로써 존속된다.

우리 사회에 영구제명에 해당하는 제도는 없다. 사법적 처벌을 통해 사회와 격리하는 절차가 있지만, 요즘은 그것이 야구계의 영구제명 처분만큼 우리 사회의 공감과 신뢰를 확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영구제명 명단은 있다. 이완용으로 상징되는 친일파들과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독재자들처럼 공동체를 배반하거나 권력을 남용해 시민을 짓밟은 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부역해 잔인하게 시민의 삶을 파괴한 정형근이나 이근안 같은 법기술자나 고문기술자들이다.

최근 그중 두 이름이 지면 위로 떠올랐다. 하나는 부고 기사 속 이근안이다. 아무 반성도 사죄도 없이 천수를 누리고 퇴장했다는 점은 씁쓸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사회와 영원히 격리됐다. 문제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선, 나름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후원회장으로 모셨다는 기사 속 정형근이다. 무지한 젊은이들이 흰색 안전모를 쓰고 ‘백골단’을 자처했던 상황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겨움과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를 모신 후보는 ‘후원회장 뽑는 선거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안다. 정형근이 국회의원이 될까 봐 기겁하는 게 아니다. 한 시대의 폭력과 고통, 남용된 권력 앞에 무력했던 시민의 억울함쯤은 이제 지나간 일이라고 넘기려는 태도가 역겹고, 그것이 어떻게든 기어 나와 또 무뎌지게 되면, 끔찍한 역사는 되풀이될 수 있음이 두렵다. 뒤늦게나마 죄상이 입증돼 처벌됐다는 기사가 아니라면, 하다못해 부고 기사도 아니라면 세상에 다시 나오지 말았어야 할 그 이름이 미디어에 도배된 것은 ‘겁나게 험한 것이 튀어나온’ 재난이다.

프로야구가 오래 가려면 영구결번도 영구제명도 필요하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국립묘지에서 파묘하지 못한다 해도 어떤 이름들은 동료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영구제명되었다.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행위는 그 피맺힌 기억에 대한 도전이다. 방어되어 공동체가 지켜지거나, 분쇄되어 역사 저편으로 함께 매장되거나 간에 결판나야 할 도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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