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살 김수동, 어머니 ‘영주씨’ 에세이 출간
“어머니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바라보고 써”
초고령사회 돌봄 살피다 부모를 이해하게 돼

1929년생 영주씨는 냉정하다. 올해 64살인 아들 김수동씨가 그동안 각별히 관찰하고 소통하며 기록한 결과를 종합하면 그렇다.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자녀들의 삶에조차 과하게 개입하는 법 없이 적절한 선을 지키며 96살인 지금까지도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와 독창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김수동씨는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노인력’(안그라픽스, 2024) 개념에 기대어 어머니 영주씨가 네가지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는데, 능숙한 자기돌봄 능력에 기반한 ‘자존력’, 사람들과 자연스럽고 친밀하게 어울리는 ‘관계력’, 노화라는 상실의 과정이 주는 좌절과 슬픔을 빠르게 정리하고 지혜롭게 회복하는 ‘적응력’,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시대 흐름에 발맞추는 ‘공생력’ 등이다.
김수동씨가 어머니와 이처럼 각별한 소통을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보·통신(IT) 기업을 경영하다 노년의 삶과 주거 문제에 관심이 생긴 그는 50대에 사회주택 활동가로 변신했고, 2016년 뜻을 같이하는 10가구가 모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북한산 인근에 공동체 주택 2개 동을 지어 입주했다. 연로한 어머니를 위한 맞춤형 집은 지었지만, 어머니와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몇년이 흘러 딸이 독립하고 아내가 부모님 간병차 친정에 장기간 머무는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바깥출입마저 어려워진 때, 어머니와 둘만 오도카니 한집에 남아 하루 세끼를 함께하게 되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일상을 찬찬히 살펴보고 전에 없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구나’ 하는 자각이 생겼다.
“제가 태어난 뒤 어머니의 삶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어머니 입장에서 어떤 일을 겪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알게 되니 전혀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렸어요. 그 이전의 삶은 말할 것도 없죠. 1929년에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6·25전쟁 2년 전에 월남하셨거든요. 낯선 타향에서 전쟁을 겪으며 5남매를 낳아 기르셨죠.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어땠는지, 아버지가 믿었던 사람에게 큰돈을 사기당하셨을 땐 어떤 심정이었고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면 어떤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시기적으로 듬성듬성한 이야기들을 질문으로 메우며 듣다 보니 혼자 듣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상당한 이야기꾼이며 비범한 유머 감각을 지녔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소소한 일상과 함께 나눈 이야기, 자신의 생각 등을 담은 ‘영주씨’ 에세이를 페이스북에 공유했는데 생각보다 호응이 컸다. 내친김에 책으로 엮었다. 올가을 출간되는 ‘냉정한 영주씨’(가제)에는 그동안 페이스북에 게시한 글에 초고령 영주씨가 들려주는 ‘행복한 나이 듦을 위한 지혜’ 등을 더 보탤 참이다. 그런데 왜 시종일관 ‘영주씨’일까.
“효자 흉내를 내기보다 친구 노릇을 하고 싶어요. 어머니에게 지금 필요한 게 친구라고 생각하거든요. 정혜신 박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당신이 옳다’(해냄출판사, 2018)에선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며 공감해주는 ‘특수한 타인’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냉정한 영주씨’는 ‘특수관계 동거인인 영주씨와 나의 동행 기록’이라고 생각하며 썼어요. 또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라 오롯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영주씨를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글을 쓴다는 의미도 있고요.”
책이 나오면 동네 단골 카페를 빌리고 가족과 이웃, 영주씨의 친구들(이 대목에서 영주씨는 “이제는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친구가 별로 없다”며 웃었다. 죽음에 관한 농담은 영주씨의 주특기다)을 초대해 출판기념회를 열 계획도 갖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멋진 이벤트를 어머니와 나 자신, 그리고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어서”다.
은빛 출판사 노항래 대표는 유시민 작가가 쓴 강순희씨 이야기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2026)를 비롯해 평범한 사람들의 자서전 출판과 자서전 쓰기 교육을 계속해왔다. 그는 “초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자서전 쓰기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노 대표가 지난 13년간 교육하고 펴낸 40~50쪽 분량의 자서전은 1천권이 넘는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에 수천종의 ‘엔딩 노트’가 있는 데 착안해, 글쓰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법을 알려주는 ‘인생노트―삶을 기록한다’(2024, 개정판)를 펴내기도 했다.
서울시교육청 등과 손잡고 청소년들의 ‘부모(세대) 자서전 쓰기’ 교육을 여러차례 진행해본 노 대표는 “평소의 대화는 주로 부모가 묻고 자녀가 (마지못해) 대답하는 식이지만, 부모 자서전을 쓰게 되면 자녀가 묻고 부모가 답하는 정반대 상황 속에서 새로운 소통 경험을 하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자서전 쓰기를 매개로 한 대화와 소통이 지역공동체 차원에서 진행되면, 이는 개인의 삶을 넘어 한 지역의 생생한 역사가 된다. 전남 구례군 매천도서관은 2018년 구례고등학교 청소년 14명과 지역 중장년 16명이 8개 조로 나뉘어 구례군 8개 읍·면에 사는 70~80대 여성 8명의 삶을 기록하는 ‘지리산 어머니 자서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렇게 펴낸 ‘그때는 그거이 사는 건갑다 했제’(구례군매천도서관, 2018)에는 일제 치하의 가난과 전쟁,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빨치산 전투와 토벌의 참혹한 기억이 고스란히 담겼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조현옥 매천도서관 사서는 지역 작가와 교사, 활동가들이 총동원된 7개월의 대장정에서 “가장 힘든 과정은 채록(인터뷰)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들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거듭 찾아오는 어린 학생들을 무척 반가워했지만,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기억을 들추는 것은 거북해했다. “즐겁고 행복했던 일이나 잘 키워낸 자녀들 자랑만 하고 싶어 하셔서 깊은 속내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러번 방문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정제’(부엌)와 같이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사투리에 적응하고, 종종 산으로 가는 이야기의 갈피를 잡아가며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요령을 조금 터득한 뒤에야 채록 작업에 가속이 붙었다. “좋은 질문은 좋은 자서전의 토대가 된다”고, 경험자와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어떤 질문이 좋은 질문일까. 김수동씨는 “구체적인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담아낼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며 “어머니 인생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한번 꼽아보시라고 했을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왔다”고 귀띔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자서전 쓰기 앱 ‘레페토 에이아이(AI)’를 개발한 이대범 레페토 에이아이 대표는 “인터뷰 경험이 전무한 어르신들은 ‘난 힘들게 살았어’ 같은 간단한 답변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선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물은 다음 답변을 집중해서 들으면서 관련 질문을 이어가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경청과 호응은 답변자를 격려해 더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채록한 에피소드를 시간순으로 배열하고, 중간중간 성긴 부분을 추가 인터뷰로 보충하면 마지막 관문인 글쓰기만 남는다. 요즘은 자서전 글쓰기에 관한 온·오프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글쓰기 교육과 연계해 소규모 인쇄·출판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도 많다.
‘회상하다’라는 뜻의 ‘레페토 에이아이’는 이대범 대표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부모님 자서전을 써보려다 실패한 뒤 개발한 서비스다. 이 대표는 부모님 인터뷰 녹음 파일을 일반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업로드한 뒤 자서전 집필을 요청했는데, 어색한 표현과 문장 연결 때문에 수정할 곳이 너무 많았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내용을 지나치게 요약하는 등 근본적인 문제점도 있었다. 레페토 에이아이는 이를 보완해 우리말과 자서전 쓰기에 특화해 개발한 인공지능 서비스다. 이용자 입맛에 맞는 문체를 선택할 수도 있어, 전문 작가 수준의 유려한 문체를 구사할 수도, 손자·손녀에게 들려주듯 담백한 문체로 서술할 수도 있다.
이 대표는 레페토 에이아이 서비스를 제공(repetoai.allthatai.io)하는 한편, 국내 대학이나 기관 등과 손잡고 다양한 세대와 계층, 공동체의 이야기를 수집해 책을 펴내고 있다. 그의 목표는 “레페토 에이아이로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채록해 ‘회고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쓴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많이 모이고 읽힐수록 우리 사회 갈등과 혐오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부모 자서전 쓰기가 확산되는 건 좋은 신호탄이라 할 만하다.
이미경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