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과학에 깃든 ‘모순된 욕망’ 사유
시적 언어도 정서 표현 넘어 의미 전달
인간은 쾌락 추구하지만 현실에선 한계
시는 대상-의식, 즉자-대자 초월한 융화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이문의 사유는 철학적 비평(평론)의 성격을 띤다. 그의 사유는 어떤 철학적 주제 자체를 파고들기보다는 이미 형성되어 진행된 각종 사조들에 대한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비평가이지만, 동시에 그의 비평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비평이다.
이런 그의 사유는 특히 문학을 중심에 놓고서 전개된다. 그의 글은 문학의 의미를 다른 각종 사유의 의미와 비교하면서 전개될 때 빛을 발한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논의를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시와 과학’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다만, 여기에서 박이문은 과학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동질화하고 있다. 사실 시는 문학의 한 장르이고 문학은 예술의 한 분야이므로, 이 비교는 짝이 잘 맞지 않는 비교로 느껴진다. ‘문학과 과학’, 아니 ‘예술과 과학’의 비교가 짝이 맞는 비교이다. 여기에서 박이문의 논의를 ‘시와 물리학’으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논의에서 무게중심은 시에 걸린다. 다시 말해, 논의는 시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해 그 비교 항으로서 과학(물리학)을 논한다고 볼 수 있다.
박이문이 이러한 비교를 행할 때 그 기본적 사유-축은 세 가지(말하자면 x, y, z축)이다. 그 하나는 ‘존재차원과 의미차원’의 구분이다. 자연과 문화, 사물과 언어로 바꿔 쓸 수 있는 이 구분은 박이문 사유 전체를 관류하는 존재론적 핵이다. 다른 하나의 사유-축은 의미(와 진리)의 축이다. 박이문의 논의는 시가 추구하는 의미·진리와 물리학이 추구하는 의미·진리의 차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마지막 세번째 축은 욕망이다. 박이문의 논의는 시와 물리학이 도대체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러한 활동들의 욕망이 무엇인지에 중점을 두어 논한다.
박이문은 우선 시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논박한다. ‘표현주의 이론’은 시를 시인의 심정이나 감정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으로 파악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적 언어는 무엇인가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쓴 시인의 심정을 토로한 것일 뿐이다. 이런 이론의 극단은 명제(진위 판별이 가능한 언어)에 속하지 않는 모든 언어는 정서적인 언어일 뿐이라는 에이어의 ‘의미 정서론’이다. 박이문은 에이어 이론을 논박하면서, 시적 언어는 “분명히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시적 언어는 진위 판별은 불가능할지라도 단순한 정서 표현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인식론적 시론’은 시가 과학과는 성격이 다른 어떤 인식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론의 극단은 과학이 아니라 시야말로 진리(‘탈은폐성’)를 드러내는 언어임을 역설하는 하이데거에게서 볼 수 있다. 이에 관련해 박이문은 “객관성을 가진, 즉 보편적으로 합의를 볼 수 있는 관점”만이 인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시적 언어는 인식을 담지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그러나 객관성을 가진다는 것과 보편적으로 합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박이문은 시에 대한 표현주의 이론과 인식론적 이론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단순한 감정의 표현도 아니고 또 과학과는 다른 방식의 인식도 아닌 시적 언어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박이문은 과학적 인식을 의식의 측면에서는 이성의 활동, 분석적 기능으로, 대상의 측면에서는 보편적 관점, 추상적 의미로 특징짓는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시적 서술을 의식의 측면에서는 감성의 반응, 융화적 태도로, 대상의 관점에서는 개별적 관점, 구체적 존재로 특징짓는다.
“시적 서술에 있어서 인식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직 논리적·개념적 사고에서만 객관성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는 논리적 사고가 비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럼으로써만 객관성은 성취될 수 있다.”(‘인식과 실존’, 186쪽)
요컨대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적 서술과 달리 시적 서술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서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시가 무엇인가를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한, 결국 시가 근본적으로 성취하려는 것은 구체적 대상을 추상하지 않은 채 추상화하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의미화하지 않고 의미화하고,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려는 것이 바로 시적 서술의 의도이다.”(‘인식과 실존’, 192쪽)
무엇인가를 언어로 표상하는 것은 추상화를 함축한다. 시가 언어의 예술인 한 시적 언어도 대상을 추상화한다. 그러나 시적 언어는 언어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언어이지 않고자 하며, 대상의 구체성, 개별성을 담고자 한다. 시적 언어는 과학적 언어와 마찬가지로 존재차원을 의미차원으로 옮기는 활동임에도 또한 동시에 존재차원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 한다. 이 점에 시적 언어의 역설적 성격이 있다. 시는 개념이 아니라 낱말로써 씌어진다고 한 말라르메의 말에는 시의 이런 성격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시를 쓰는가? 인간으로 하여금 시를 쓰도록 추동하는 욕망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선, 박이문이 볼 때 인간이란 동시에 두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중체이다. 존재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존재이지만, 의미차원에서 볼 때 다른 존재자들과는 달리 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박이문은 다시 의미의 차원을 감성의 차원과 지성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다. 그리고 과학적 언어를 지성의 언어로, 시적 언어를 감성의 언어로 특징짓는다.
“과학적 서술과 시적 서술은 각기 지성과 감성의 소산에 불과하다. 인간은 지성으로 사고하고, 감성으로 꿈꾸며 노래하고, 생물체로서 살며, 물체로서 그냥 존재한다.”(‘인식과 실존’, 213쪽)
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문화적 존재인 인간은 자연에 더 가까운 감성의 차원에서 시를 쓰고 자연에서 멀어진 차원인 지성의 차원에서 과학을 한다. 그렇다면 감성과 시, 지성과 과학은 과연 인간 욕망의 어떤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리고 두 욕망 사이에는, 그리고 두 욕망의 각각의 구현인 시와 과학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박이문은 니체, 프로이트, 사르트르의 욕망론을 참조해 “인간의 근본적 욕망”이 무엇일까를 추적한다. 니체는 이 근본적인 욕망이 ‘힘에의 의지’에 있다고 보았거니와, 박이문은 이 생각이 “정말로 인간의 핵심을 찔러 보인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어째서 인간이 ‘힘’을 찾는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프로이트의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을 논한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현실의 제한에 부딪치게 되며, 이 제한을 돌파하기 위해 ‘승화된’ 쾌락―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욕망은 힘의 추구가 아니라 그것 아래에서 꿈틀대는 리비도라는 성적 욕망의 해소인 것이다.
그러나 박이문은 프로이트의 이런 설명도 인간존재에 대한 다소 일면적인 이해임을 지적하면서, 사르트르의 인간존재론에서 인간 욕망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발견한다.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존재론에서, 즉자(卽自)는 자의식을 갖지 않은 모든 존재자들을 가리키고 대자(對自)는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즉자는 그 안에 결핍을 내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존재한다. 반면 자의식적인 대자는 속이 비어 있어 결핍을 내포한다. 이 때문에 그것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애쓴다. 소은 박홍규가 지적했듯이, “운동의 내면은 결핍이다.” 이 결핍을 사르트르는 ‘무’(無)로서 파악한다. 그래서 즉자와 대자는 곧 존재와 무로서 대비된다.
대자의 본성은 무이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이 무에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한다. 그리고 무는 어떤 규정성도 채워져 있지 않음이기에, 인간은 자유를 본성으로 가진다. 그리고 그는 자유롭기에 늘 선택을 해야 하고, 늘 열린 선택지들 앞에 서야 하기에 불안하다. 결핍, 자유, 선택, 불안 등을 본성으로 가지는 대자적 존재인 인간은 그러한 무라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며, 스키를 타든 음악을 듣든 사랑을 나누든 갖가지 방식으로 마음의 결핍이 꽉 채워진 만족(滿足)의 상태를 지향한다.
그러나 온전한 만족은 불가능하다. 이는 그러한 만족감이 일시적일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대자성이 완전히 메워져서 즉자적 자족(自足)의 상태에 도달하면 얄궂게도 인간―즉자가 된 인간―은 자신의 그러한 만족감, 자족감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대자로서의 자신의 구멍을 끊임없이 메우고자 하면서도 즉자가 되지는 않으려 애쓰게 된다. 순수 대자와 즉자 사이를 오가면서 방황하는 인간의 이러한 삶을 사르트르는 “부질없는 열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박이문은 이를 “모순된 욕망”이라 부른다.
박이문은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분석을 진화론적 분석으로 보완할 경우 즉자와 대자의 대조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점차 지성적 존재가 된 결과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순된 욕망이란 곧 자연으로 회귀하고픈, 인간이 그로부터 분열되어 나오기 이전의 본래적 총체성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에 다름 아니게 된다. 박이문은 이런 불가능한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시작(詩作)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곧 존재차원에서는 자연과 하나이지만 의미차원에서는 자연과 불연속을 이루는 인간이 의미차원, 언어차원에 머무르면서도 동시에 존재차원과 합일하고픈 욕망이다.
“시적 의식은 인간의 존재적 차원과 의미적 차원의 경계가 된다. (…) 시적 세계는 한편으로 존재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 존재이며, 또 한편으로는 의미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 시의 의도는 언어 없는 경험을 얻는 데 있으며,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것을 언어로 표현코자 함에 있다. (…) 그것은 대상과 의식이, 인간과 자연이, 주체와 객체가, 즉자와 대자가, 너와 내가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용해·융화된 세계이다. (…) 인간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비극적 삶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잠시나마 가장 근본적인, 바슐라르의 말대로 ‘휴식’과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 시적 경험 속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잠시나마 우주 전체와 화해한다.”(‘인식과 실존’, 232~233쪽)
이정우 철학자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