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웅이라는 악마가 활개를 치던 시대 [금자㉚]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의 서거 직후 모습. 백범 김구 암살과 국회프락치 사건의 각본 기획자는 한 명이라는 게 정경모 선생의 주장이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이번엔 따뜻한 유자차를 준비했다.

9월 중순의 아침 햇살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폭염이 떠난 뒤 오랜만에 맛보는 차분한 날씨였다. 1호선 전철 신이문역에서 내려 곧장 머릿속 지도를 따라 약속장소인 오피스텔로 향했다. 4개월 만이었다. 한국에서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한 한 가장 독보적인 저작을 낸 김정기(86) 한국외대 명예교수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가 쓴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Ⅰ·Ⅱ’와 ‘국회프락치사건 재판기록’을 완독한 뒤 질문 항목이 더 늘어났다. 무엇보다 여성의 몸에서 증거물 1호를 찾아낸다는 기상천외하고 외설적인 시나리오의 출처가 어디인지에 관해 묻고 싶었다.

책더미와 서류뭉치로 가득 찬 오피스텔 내부는 전보다 더 어지러워진 느낌이었다. 넉 달 전 방문 때 인근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간 것은 센스 없는 선택이었다. 교수님은 일절 손대지 않았다. 연로한 분에 대한 배려심 부족을 자책했던 기억이 나 이번엔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주문해 가져갔다. 교수님은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음료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실없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검사 오제도의 말이 사실일까요?”

“순 거짓말이죠.”

“그럼 증거와 정황을 조작했다는 건데, 만약 그랬다면 오제도가 직접 창작한 것이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오제도의 말’이란 국회프락치 사건과 관련해 재판부에 제출된 증거물 1호(증제1호)에 관한 이야기다. 남로당의 국회공작 암호문건 등으로 구성된 이 증거물은 본래 남로당 여성 공작원 정재한의 음부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그를 미행한 경찰이 개성 인근의 파출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게 한끝에 찾아낸 것이었다고 했다.

증거물 1호를 뒷받침할 만한 증언과 진술은 전혀 없었다. 정재한 등 암호문건 당사자들에 대한 증인출석 요청은 재판부에 의해 기각됐고, 이들은 공판 진행 중 다른 사건과 관련 국방경비법 이적죄로 사형집행을 당하기까지 했다. 오제도는 개의치 않고 각종 회고록과 증언을 통해 스파이소설의 한 장면 같은 정재한 검거 과정을 사실인 것처럼 떠벌여왔다. 그러나 이는 허위이며, 각본을 쓴 이도 따로 있다는 게 김정기 교수의 말이다.

“그럼 누구 머리에서 나왔을까요?”

“김지웅의 각본이었다고들 해요.”

“네네. 책에도 그렇게 쓰셨죠.”

김지웅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김지웅은 1949년 당시 한민당 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이었던 김준연의 비서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편 밀매, 관동군 스파이 같은 음습한 이력이 딸려 나온다. 해방 직후 현대사를 다룬 여러 책에서는 ‘정치 브로커’로만 등장할 뿐, 공식 기록은 없다. 김지웅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에 관한 정보가 쌓일수록 국회프락치 사건의 실체가 마구 일그러지고 뒤틀린 형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김지웅과 얽혀있는 인물들에 관해 질문했다.

“그럼 오제도의 역할은 어떤….”

“오제도는 실행자였죠. 그런데 단순히 프락치 사건으로 제헌국회의원들을 기소한 실행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상부에 있던 사건 조작자들의 음모를 실행했다는 의미에서 실행자입니다. 거기에 또 한 명의 검사, 선우종원이 있었고요.”

“그럼 상부의 조작자들은 누구라고 보시나요?”

“당시 한민당 의원이었던 김준연, 내무부 차관이었던 장경근, 서울시 경찰국장 김태선이 대통령 이승만의 암묵적 지시에 따라 벌인 일이 국회프락치 사건이라고 보는 거죠.”

김정기 교수는 김준연, 장경근, 김태선을 국회프락치 사건에 관한 조작과 음모의 기획자로 지목해서 말했다. 여기 더해 각본 기획자는 김지웅이었다고 했다. 이는 당시 정국에 대한 여러 연구결과와 김정기 교수 본인의 분석을 종합한 결론이다.

이들은 대부분 19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벌어진 김구 암살 사건의 배후로 거론되는 사조직 ‘88구락부’에 소속된 인물이기도 했다. 김지웅의 경우엔 김구 암살극의 실제 시나리오를 쓰고 암살범 안두희를 조종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실제 199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설치됐던 ‘백범 암살 진상조사소위원회’는 1년 뒤 “‘의혹의 모략꾼’ 김지웅이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했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5·10총선거 1주년인 1949년 5월9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한민당 소속 국회의원 김준연의 기고 ‘의정단상의 1년 회고’. 국회프락치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면 갈무리

장경근과 김태선은 1949년 6월6일 중부경찰서 윤기병에게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습격과 특경대원 무장해제를 지시한 최고위 라인이었다. 김준연은 5·10총선거 1주년인 1949년 5월9일 동아일보 1면에 쓴 ‘의정 단상의 1년 회고’를 통해 국회프락치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 글에서 남북협상과 외군철퇴 문제를 거론하는 소장파 의원들을 언급하며 “김일성을 따른다”, “남로당 선전방침을 추종한다”고 맹비난했다. 이는 단순한 기고가 아니라 반민특위 해체와 국회프락치 사건의 신호탄 역할을 하는 정치공작으로서 조명을 받아왔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친일파였거나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무실 습격과 무장해제를 계기로 반민특위는 해체됐다. 이후 노일환·강욱중·김약수 등 소장파 제헌국회의원들이 잇따라 국회프락치 혐의로 검거되며 감옥으로 갔다. 백범 김구는 총탄에 스러졌다. 이 모두가 1949년 6월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제각각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음모라는 점에서 오늘날 ‘6월 공세’라는 역사적 개념으로 정리돼 불리고 있다. 이 공세로 남북협상과 평화통일에 관해 목소리를 내며 전쟁 억지력을 행사하던 이들은 깨끗하게 제거되었다. 전쟁위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정확히 1년 뒤 전쟁이 터졌다.*

“근데 김지웅이 ‘음부 암호 운반설’의 각본을 썼다는 문헌적 근거, 즉 전거(典據)가 하나도 없잖아요.”**

“문서를 남길 리 없죠. 그 사람은 비선이었는데요. 이승만 정부에는 폭력정치에 동원된 ‘그림자 정부’가 너무 많았어요. 서북청년단이 대표적이죠.”

“일본에서 40년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정경모 선생님이 쓴 ‘찢겨진 산하’***를 보면 김지웅의 행적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교수님도 책에 이 이야기를 인용하셨고요.”

“그 말씀이 설득력이 있으니까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거죠.”

정경모 선생은 ‘찢겨진 산하’에서 백범 김구의 입을 빌려 김지웅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는데, 그의 경력과 행적에 대한 세부 묘사가 매우 정교하다.

“김지웅은 한민당 국회의원 김준연의 ‘비서’인 동시에 ‘국방부 고문’ ‘헌병사령관 보좌관’등의 직함을 가지고 자가용 4561번을 몰고 다니면서 국방부·헌병사령부·서북청년회(반공폭력조직) 등을 마음대로 드나들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지요. 해방 직후 그는 중국 국부군(국민당 군대) 소장 차림으로 나타나서는 자기가 허베이성에서 중국군 정보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제4방면군의 여단장을 지낸 중국명 왕금산(汪金山)이라고 허풍을 치고 다니기도 했지요.

그건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고, 실제로 그자는 관동군 헌병대의 통역을 시발로 지난, 쉬저우 등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아편 밀매에 종사하는 한편, 관동군과 왕징웨이 괴뢰정권에게 옌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충칭의 임시정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던 적의 스파이였소.(중략)

이 사건(국회프락치 사건)의 유일한 ‘물적 증거’는 항간에서 말하는 ‘음문문서’, 즉 어느 중년 여인의 국부에서 나왔다는 암호 연락문이었소. 앞으로 일어날 엽기적인 사회적 소동을 충분히 계산한 다음 여인의 비밀스러운 곳에 날조된 비밀문서를 숨긴다는 악마적 각본을 꾸며낸 게 김지웅이었지요. 실제 연출은 일제시대의 고등경찰이었고 당시 시경국장을 하고 있던 김태선이 맡았고, 검사역을 맡은 것은 재일 한국인 정치범 가족들에게 터무니없는 몸값을 강탈해 공포의 표적이었던 ‘검은 변호사’ 오제도였습니다.

김지웅은 미즈하라 기요마사(水原淸正)라는 이름으로 지금 일본에서 ‘뱃속 편하게 지내고 있으며 한국에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지요. 한일 양쪽 권력으로부터 비호를 받으면서 말이오. 김지웅이 한국에서 도망쳐 밀입국한 것은 1960년 8월28일인데, 그해 4·19혁명을 통해 민족정기가 얼마만큼 되살아나 김구 암살에 대한 규명의 손길이 뻗쳤기 때문이지요.”

인터뷰를 끝낸 뒤 김지웅에 관해 다른 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세명의 역사학 연구자에게 “김지웅을 어떻게 보느냐”는 카톡 공통질문을 보내보았다. 모두 학계는 물론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각자의 분야에서 ‘대작’을 낸 역사 저술가들이다

“김지웅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아서 저도 잘 모릅니다. 정경모 선생이 원래 일본통이니 어디서 직접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싶네요.” (A교수)

“암약했던 사람이었잖아요. 어떤 공작을 기안했다는 문서가 존재할 리 없죠. 근데 정경모 선생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다들 김지웅이 했을 거라고 합니다.”(B교수)

“김지웅은 극우테러 음모공작의 허드렛일을 중간관리하는 소악당 정도. 일제시대 경력 미상. 자칭 중국군 정보공작? 혹은 일본군 헌병 끄나풀 정도. 해방 후 가장 최악의 정치인이자 공작정치의 일인자가 된 김준연의 똘마니로 위세. 정치적 위상이나 역할은 전무. 민족의 현실과 진로에 암적인 존재. 이런 악마적 존재가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게 해방 직후~한국전쟁 이전 상황.”(C교수)

김지웅에 대한 정경모 선생의 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아예 근거 없다고 반응하는 이는 없었다. C교수가 메모 형식으로 보내온 답장에는 날것의 단어가 많았다. 정경모 선생과 똑같이 “악마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 ‘음부 암호 운반설’에 대한 별도 질문에는 “유치하고 저열한 것으로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허위 가공”이라고 평했다. 평소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극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그의 캐릭터를 떠올리면 사뭇 예사롭지 않은 톤이어서 놀라웠다.

아, 김정기 교수와의 인터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자차는 차갑게 식었지만, 더 할 말이 있었다. 국회프락치 사건 공판을 낱낱이 기록해 결국 책의 산파가 돼준 그레고리 헨더슨에 관해 물어볼 이야기가 남았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반헌법행위자열전3-검찰1’(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편, 사회평론아카데미, 2026)

**국회프락치 사건 공판을 기록해 미 국무성에 보낸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삼등서기관 그레고리 헨더슨도 나중에 학자가 되어 국회프락치 사건을 연구하며 정경모 선생의 ‘찢겨진 산하’를 주요하게 참고했다. 다만 헨더슨은 정경모 선생의 정직성을 높이 사면서도 “내가 필요한 것은 확실한 전거(reference)”라고 밝히면서 안타까워했다는 게 헨더슨이 남긴 자료를 분석한 김정기 교수의 전언이다.

***‘찢겨진 산하’는 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1986년 거름, 2002년 한겨레출판에서 재출간됐다. 여운형과 김구, 장준하 세 사람이 사후세계에서 만나 가상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해방 이후 역사의 격동기를 그려내고 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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