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러 제재 장기화, 수출대금 회수의 해법은 소송보다 계약서에 있다

-김민수 법무법인(유한) 대륜 변호사 법률칼럼

대러시아 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러시아 거래처를 상대로 한 국내 기업의 수출대금 회수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거래처의 고의적인 채무불이행이나 지급능력 상실, 파산이 주요 위험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러시아 기업에 지급 의사와 자력이 충분하더라도 제재와 금융규제로 결제 경로 자체가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김민수 변호사/사진제공=법무법인(유한) 대륜이런 환경에서 출발점은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 현지 자산을 담보로 설정하거나 현지 은행의 지급보증을 받아두는 방식은 기본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있지만, 제재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다. 담보를 실행해 자금을 확보한 뒤에도 다시 해외로 송금하는 단계에서 금융·외환 규제라는 장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 지역에 있는 관계회사나 제3자의 보증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 대상이 된다. 다만 제3국에 소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회수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보증인의 소유·지배관계는 어떠한지, 제재 대상과 연결돼 있지는 않은지, 실제 보증 실행과 강제집행이 가능한지까지 살펴봐야 비로소 보증의 실질적인 가치가 드러난다.

결제조건도 같은 맥락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선급금 비중을 높이거나 잔금 지급 전 선적을 제한하는 방식은 가장 직접적인 위험 관리 수단이다. 루블화나 위안화 등 대체통화를 활용하는 선택지도 있지만, 통화만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결제 과정에서는 어느 은행이 자금을 취급하고, 어떤 중개은행을 거치며, 거래 상대방과 금융기관의 제재 지위가 어떠한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대러 거래에서는 결제통화 하나보다 결제가 중단됐을 때 합법적인 범위에서 무엇으로 갈아탈 수 있는지가 더 현실적인 질문이 된다. 특정 결제수단이 막혀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계약에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대금 미지급이 발생했다면 접근법은 달라진다. 이때부터는 상대방의 재산을 얼마나 빨리 파악하고 보전하느냐가 실질적인 회수 가능성을 좌우한다. 러시아 '상사소송법'은 일정한 요건 아래 소송 전이나 소송 중 재산보전조치를 인정하고 있다. 단순한 미지급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고, 자산 처분이나 제3자 이전 등 향후 집행을 어렵게 만들 구체적 정황이 관건이다.

관할 역시 간과하기 어려운 변수다. 러시아는 2020년 상사소송법에 제248조의1과 제248조의2를 도입했다. 제재 대상자가 관련되거나 제재에서 비롯된 분쟁에 대해, 러시아 측 당사자가 신청하면 러시아 상사법원이 전속관할을 행사할 수 있고, 상대방에게 해외 소송이나 중재를 진행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명령까지 내릴 수 있게 한 규정이다. 러시아 법원은 실무상 이 조항을 넓게 적용해왔다. 따라서 상대방이 제재 대상이거나 분쟁이 제재와 맞닿아 있다면, 계약서에 싱가포르나 스톡홀름 등의 중재조항이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법원이 관할권을 주장할 가능성, 제3국에서 받은 중재판정을 러시아에서 집행할 수 있는지가 별도의 쟁점으로 남는다.

더 복잡한 문제는 승소 이후일 수도 있다. 러시아는 제재에 대응해 비우호국 채권자에게 돈이 빠져나가는 통로를 단계적으로 좁혀왔다. 대표적인 것이 2022년 3월 대통령령 제95호다. 비우호국 채권자에 대한 대출·차입·금융상품상 채무가 월 1,000만 루블 상당을 넘으면, 채무자가 채권자 명의의 특별 루블 계좌(C계좌)에 루블로 입금해 이행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후 같은 방식이 이익배당에도 도입됐고, 2026년 6월에는 은행예금으로까지 확대됐다. 한국도 비우호국 목록에 포함돼 있다. C계좌에 들어간 자금은 외화 환전이나 해외 이전에 당국의 허가가 필요해 사실상 묶이게 된다.

일반적인 수출대금은 아직 이 제도의 직접 적용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적용 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비우호국으로 향하는 자금 이전에는 여러 겹의 허가 제도가 작동하고 있다. 외국 채권자가 판결이나 집행으로 자금을 확보하더라도 이를 곧바로 해외로 이전하지 못할 수 있는 이유다. 승소와 회수 사이에 또 하나의 문턱이 있는 셈이다.

제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러 거래의 신용관리도 자연스럽게 보수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물건을 먼저 보내고 문제가 생기면 사후적으로 법적 대응에 나서는 방식에는 과거보다 훨씬 큰 불확실성이 따른다. 거래 상대방의 제재 여부와 결제 가능성을 확인하고, 선급금·분할선적·보증·결제수단·관할을 처음부터 하나의 구조로 묶어야 하는 이유다.

대러 거래에서 채권 회수의 승패는 소송 단계가 아니라 계약 단계에서 이미 상당 부분 정해진다. 제재 환경에서는 계약서의 한 조항, 보증인의 소재지, 결제은행의 선택이 훗날 채권의 실질적인 가치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 따라서 거래를 시작하는 시점에 '이 거래는 나중에 실제로 회수할 수 있는가'를 따져 보고 회수 가능한 구조를 갖춰 두는 것이 지금의 제재 환경에서 가장 현실적인 채권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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