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필수의약품 지정…한국,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입법 공백에 심사 지연
해외 상당수 국가, 임신중지 가능 주수·처방 기준 제도화
여성단체, 신속 도입 촉구…의료계 "법·진료지침 정비가 우선"

미국 워싱턴DC의 대법원 앞에서 2022년 5월 3일(현지시간) 한 시위자가 '절대로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라는 문구가 적힌 옷걸이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철제 옷걸이는 과거 낙태가 불법이었던 시절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이 낙태를 위해 쓰던 도구로, 그 부작용으로 많은 여성이 사망하거나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옷걸이는 현재 낙태 합법화의 상징으로 사용된다.[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경구용 임신중절약물인 '미프진'의 허용 방안 검토를 언급하면서 이와 관련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먹는 임신중절약물은 이미 전 세계 100여개 국가에 도입됐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후 대체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그 동안 도입 논의가 사실상 정체돼있다.
후속 입법과 공식 의료지침이 없는 가운데 임신 중절은 여전히 비급여 수술 중심으로 이뤄지며, 비용과 의료기관 정보도 공개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미프진 등 임신중절약물을 해외에서 불법으로 직접 구매해 복용하는 사람도 암암리에 존재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임신중절약물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가운데 여성단체 등은 여성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임신중절약물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료계와 종교계 등은 이 같은 약물이 여성의 건강과 태아의 생명을 동시에 위협할 수 있다며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에 관련 해외 법·제도 및 국내 도입 추진 경과 등을 살펴봤다.

[WHO 지침서 캡처 후 번역]
◇ 먹는 임신중절약물, WHO 핵심 필수의약품…100여개국서 사용
미프진은 1980년대 프랑스에서 개발돼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 등 해외 각국에서 판매되는 미페프리스톤 성분의 경구용 의약품이다.
미페프리스톤은 임신 유지에 필요한 프로게스테론의 작용을 차단하는데, 표준요법은 미페프리스온과 자궁을 수축시켜 임신 조직을 배출하는 미소프로스톨과 병용하는 것이다.
이 중 미소프로스톨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요법도 약물적 임신 중절 방법으로 인정되나, 일반적으로 두 약을 함께 쓰는 것을 더 효과적으로 본다.
WHO는 2019년 전문가위원회 심의를 통해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약물적 임신 중절을 위한 핵심(core) 필수의약품으로 등재했다.
WHO의 '양질의 임신 중절 의료를 위한 임상 실무 지침서'에서는 약물을 통한 낙태를 낙태 수술과 함께 대표적인 임신 중절 수단으로 소개하며 약물적 임신 중절을 임신 12주 이하(자가관리)와 12주 이상(의료기관 관리) 모두에서 효과적이라며 권장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또한 2010년 '산부인과에서 미소프로스톨 사용시 위험과 주의점' 문서에서 약물적 유산이 일반적으로 수술적 유산보다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여성의 건강 상태와 임신주수에 따라 투여량과 방법이 달라야 하며, 자궁파열 등 위험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평등가족부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경구용 임신중절약물은 전 세계 101개국에서 허용되고 있다.
WHO의 최근 '국제 낙태 정책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한 결과 미소프로스톨을 승인한 나라는 123개국(이하 중복)이다. 미국, 캐나다 등 84개국은 미페프리스톤 혹은 미페-미소프로스톨 병용제품을 승인했다.
미페-미소프로스톨을 병용한 임신 중절 방법을 법 또는 정책, 가이드라인 등에 명시한 나라는 61개국이다. 미소프로스톨 단독 요법이 규정된 국가는 44개국이다.
최근 사례를 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경구용 임신중절약물을 허용하지 않던 일본이 2023년 미페-미소프로스톨 병용제품을 처음 승인했다.
일본에서는 임신 9주 이하 산모에 대해 모체보호법 지정 의사만 사용할 수 있고, 지정 의료기관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도록 했다.
호주나 영국 등은 예전부터 미페-미소프로스톨 병용제품이 허용돼 있었으나, 2020년대 들어 처방 가능 의사 범위를 확대하고 가정 복용의 길을 열어주는 등 접근성을 높였다.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앞둔 2019년 4월 11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 찬성측과 반대측 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해외 임신중절 가능 주수는 12주∼24주…약물 허가는 9∼10주
우리나라에서는 2019년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사실상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면서 '먹는 낙태약' 도입 논의가 재점화됐다.
찬반 여론이 거세게 맞서는 가운데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낙태죄 관련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폐기되면서 낙태 허용 가능 주수 등이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이 같은 법적 공백 속에서 임신중절약물 또한 도입되지 않았다.
임신중절약물이 수입돼 국내에서 유통되려면 약사법에 따라 식품의약안전처로부터 품목 허가를 받아야 한다.
2021년 낙태죄가 효력을 상실한 후 현대약품이 미페-미소프로스톨 병용제품을 국내에 반입하려 세 차례에 걸쳐 식약처에 품목 허가를 신청했지만, 법적 근거 미비 등 때문에 아직도 심사 중이다.
임신중절약물 도입을 국정과제로 확정한 이재명 정부는 현재 성평등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관계 부처들이 임신중절약물을 도입할 방안 등을 포함한 임신 중절 전반의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논의가 지지부지하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이 대통령은 최근 다시 미프진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방치하는 건 옳지 않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하는 건 무책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낙태 가능 혹은 임신중절약물 투약 가능 주수 등을 법으로 정하려면 오래 걸릴 수 있으니 의사의 양심과 재량에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제안했다.

'세계 안전한 낙태의 날'인 2021년 9월 28일(현지시간)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시위대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에 대한 권리를 지지하며 행진하고 있다.[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임신중절가능 주수와 임신중절약물 투약 가능 주수는 다르게 규정돼 있는 경우가 많다.
일단 임신중절 가능 주수와 해당 주수 이후의 허용 사유·의료적 판단 절차 등은 법률이나 하위 규정으로 정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프랑스는 본인의 요청에 따른 임신 중절을 임신 14주 말까지, 독일은 수정 후 12주 이내로 허용한다. 이후에는 임산부 건강에 중대한 위험이 있거나 태아에게 중대한 질환이 예상되는 경우에 가능하다.
뉴질랜드는 20주까지는 자격 있는 의료인이 임신 중절을 시행할 수 있고, 20주가 넘으면 의료인이 임신 중절의 임상적 적절성을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영국은 일반적으로 임신 24주 미만까지 두 의사의 판단 아래 임신 중절이 가능하다.
캐나다처럼 법정 주수 상한을 두지 않고 의료진과 의료기관의 임상 기준에 맡기는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법무부가 2021년 제시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에서 임신 초기인 14주까지는 임부의 임신 중절을 처벌하지 않고, 임신 중기인 24주까지는 성범죄 등 특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 중절이 가능하도록 조건을 달았다.
임신중절약물의 허가 관련 내용은 좀더 명확하다.
미국은 임신 10주, 마지막 월경 시작일부터 70일까지고, 캐나다와 호주, 일본, 뉴질랜드, 프랑스 등은 임신 9주, 63일 이하로 승인됐다.
영국에서는 가정 복용은 임신 9주 6일 이하까지 가능하고, 그 이후에도 병원에서 약물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돼있다.
다만 제품의 허가사항상 사용 주수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일부 국가에서는 임신 중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의료진이 임상지침과 환자의 상태 등을 고려해 허가사항을 벗어나 약물을 사용하는 '오프라벨 처방'을 하기도 한다.

2023년 12월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안전한 임신중지약(미프진) 도입과 모자보건법 개정을 가로막는 보건복지부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WHO "임신중절 접근성, 건강·웰빙 보장 및 성평등 달성에 필수적"
WHO는 여성이 안전하고 존중받으며 차별 없는 임신중절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중 건강과 웰빙 보장 및 성평등 달성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WHO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연간 임신의 절반에 가까운 1억2천100만명이 계획되지 않은 임신을 하고, 이런 임신의 60%가 중절로 귀결된다.
WHO는 이처럼 낙태는 흔한 보건·의료절차이고 권장 방법을 사용한다면 매우 안전할 수 있으나 45%의 낙태가 안전하지 않게 이뤄진다고 지적한다.
또 임신 중절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을 시 여성의 신체적 안녕(well-being)뿐만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안녕에도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입장은 임신중절약물의 도입을 찬성하는 여성단체 등의 주장과도 맞닿아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약물을 통해 임신 중절을 한 여성들이 "의사가 권해서, 수술보다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로, 저렴해서, 수술 가능한 병원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의약품을 찾았다"고 주장한다.
공동행동은 "하지만 약물을 구하려면 병원의 처방이 아닌 공신력이 없는 온라인 또는 지인을 통해야 했고,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상담하거나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며 "정부는 여성들이 충분히 안전하고 저렴하게, 어디서나 쉽게 제공받아야 할 권리를 훼방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임신중절약물을 신속하게 허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면 일부 시민단체들과 종교계, 의료계 인사들은 임신중절약물이 여성의 건강상 위험을 야기하고 태아 생명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한다.
태아·여성보호국민연합,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프로라이프, 카일생명존중운동, 생명운동연합 등은 최근 약물 낙태 도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법적 근거가 없는 낙태 약물 수입 허가 시도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와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또한 성명을 내어 임신중절약물이 음지에서 거래되는 현실을 개선하고 안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표준 진료지침과 사후관리 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의약품 판매와 처방부터 허용하는 방식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앞서 약물을 통한 유산은 일반적으로 수술적 유산보다 안전하다고 밝힌 대한산부인과학회도 "여성의 건강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용량 및 방법으로 투여돼야 해 주의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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