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임두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영동 유족회장

“열살 때 잃은 아버지에 관한 원한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어요. 나 같은 아픔과 한을 지닌 이들 돕는 거야 당연하죠.”
임두환(86)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영동 유족회장의 말이다. 임 회장은 요즘 3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 2026년 2월26일~2028년 2월25일)가 진행하는 과거사 진실 규명에 힘을 쏟는다. 그는 지난 2월말부터 영동지역 민간인 희생자 유족 등 20명의 진실 규명 신청서 작성을 도왔다. 4s
그는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와 1, 2기 진화위 때 영동지역 민간인 희생자 유족 259명의 진실 규명 신청을 해 239명의 진실 규명 결정을 끌어내, 국가의 사죄를 받아냈다. 박 대표는 대전·충청뿐 아니라 전국 민간인 희생자 기록을 발굴하고, 유족 등의 기억을 기록하는 저술 노동자다. 박 대표는 “노근리 사건을 뺀 영동지역 민간인 희생자가 805명인데, 지금까지 30% 넘는 희생자 유족이 진실 규명을 신청하고, 신청자의 90% 이상 진실 규명이 결정됐다. 대략 전국 평균 신청이 5% 미만인 것과 견주면 임 회장의 성과는 대단하다. 임 회장이 없었다면 영동지역 민간인 희생자의 한을 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곧 영동 민간인 희생자 진실 규명의 역사”라고 했다.
그는 의문사한 아버지 등 한 많은 가족사를 지닌 근현대사의 산증인이다.
그의 아버지 임우영씨는 영동군 용화면사무소 호적계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좌익 활동 혐의로 1948년과 1949년 경찰에 연행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이 난 뒤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다. 대전 골령골에서 벌어진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피해자다. 아버지가 희생된 뒤 집안을 건사하던 어머니는 정미소에서 하반신 파열 사고를 당한 뒤 시름시름 앓다가 1955년 3월 숨졌다.

“형(임세환)은 다친 어머니 이식 수술을 위해 허벅지 살 25㎝를 떼어줬지만 과다 수혈에 따른 빈혈 등에 시달리다 1968년 2월 서른한 살 나이로 숨을 거뒀어요. 형은 교사였는데, 신문에 ‘효자 선생 돕기’ 기사가 날 정도였어요.” 지금 영동군 영동대교 앞엔 영동군민 모금 등으로 세운 ‘효자 임세환 선생 효행상’이 있다.
1·2기 진화위 때 시민단체와
희생자 239명 진실규명 성과
68살 때 자연마을 401곳 돌며
100일 동안 희생자 805명 발굴
전국 평균보다 규명률 월등 높아
부친, 대전형무소 학살 피해자
1기 진화위 때 진실규명 받아
가족을 허망하게 보낸 임 회장은 2002년부터 아버지 죽음의 진실 규명에 나섰다. “기록도 뒤지고, 동네 어르신 만나 증언도 듣고,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가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사건 연루자’로 억울하게 숨진 것을 확인하고, 1기 진화위에서 진실 규명 결정을 받았어요. 국가 권력에 의해 불법 처형된 것을 국가로부터 사죄받은 그 순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아버지의 한을 푼 뒤에도 그는 이웃들의 한을 푸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06년 영동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유족회 창립을 주도한 이후 영동지역 민간인 희생자 진상 규명에 힘을 쏟아왔다. 지금껏 이어지는 희생자 합동 위령제도 그의 노력 덕이다.
그는 2008년 진화위에서 ‘한국전쟁 전후 영동군 피해자 실태 조사사업’을 할 때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등과 100일 동안 영동지역 자연 마을 401곳을 돌며 민간인 희생자 805명을 발굴했다. 당시 지독한 ‘메모광’인 습성에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꼼꼼함, 칼같은 기억력, 아버지 죽음의 진상 규명을 하면서 익힌 노하우 등이 위력을 발휘했다.

함께 영동을 누빈 박 대표는 “당시 임 회장은 68살 청년이었다. 한번도 힘들어하지 않고 제 일 하듯 유족을 만나고, 기록했다. 지금 봐도 임 회장의 활동일지는 단연 압권이었다”고 귀띔했다. 실제 그는 지금도 만난 이, 모인 시간·장소 등을 낱낱이 담은 빛바랜 20여년 전 활동일지를 간직하고 있다.
86살이 무색한 민간인 희생자 진상 규명 현역 활동가 임 회장은 민간인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한을 푸는 제2의 인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1967년 7월부터 1989년 12월 말까지 영동군청·영동교육청 등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했다. 이후 암 투병 등으로 쉰 몇해를 빼곤 이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와 같은 한을 안고 사는 이들이 너무 많아 외면할 수 없어요. 시골에서 글깨나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유족의 아픔은 유족이 가장 많이 공유할 수 있다는 마음에 성심을 다했어요. 어쩌면 평생의 업이라고나 할까요. 힘닿는 데까지 하다 가야죠. 내 일이니까.”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