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전복…옥상이 품은 ‘민주적’ 가치

높은 곳에서 자신이 살아가던 지상을 내려다보는 행위는 일종의 심리적 여행이다. 아래에서는 죽고 못 살 것 같던 문제들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먼지만큼 작게 느껴지고, 그 속에서 겪었던 일들 역시 생각보다 대단치 않았다는 무언의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현실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기 위해 옥상을 찾는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 세종특별자치시 누리집 갈무리

기분이 몹시 가라앉을 때, 혹은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가슴이 답답할 때 도시인들은 무의식중에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향한다. 멀리 바닷가로 여행이라도 가면 좋겠지만, 일상의 굴레에 묶인 대다수 현대인에게 옥상은 일상에서 허락된 가장 가까운 도피처다. 담배 연기 한 모금에 시원한 바람을 섞어 보내며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묘한 위안을 얻는다. 건축적으로는 단순히 건물을 덮는 평평한 지붕에 불과한 이 공간에 왜 사람들은 이토록 많은 감정을 투영하는 걸까.

그 비밀은 옥상이 만들어내는 ‘시선의 전복’에 있다. 높은 곳에서 자신이 살아가던 지상을 내려다보는 행위는 일종의 심리적 여행이다. 아래에서는 죽고 못 살 것 같던 문제들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먼지만큼 작게 느껴지고, 그 속에서 겪었던 일들 역시 생각보다 대단치 않았다는 무언의 위안을 얻는다. 지상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거리까지 함께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현실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기 위해 옥상을 찾는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 때문에 옥상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해방과 치유의 무대로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들은 답답한 현실을 잠시 벗어나거나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때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직장인들에게 옥상이란 수직적 위계가 지배하는 사무실 공간에서 잠시 위계가 멈추는 ‘치외법권’의 장소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의 제주 집 지붕은 두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가 비로소 겹쳐지는 가장 은밀하고 낭만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 역시 그림이 막히거나 현실이 답답할 때마다 굳이 힘들게 지붕 위에 올라 술을 마셨다. 미끄러운 기와 위에서 균형을 잡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지붕을 찾은 이유는 지붕 위에서 펼쳐지는 한옥의 기와 물결이 일상의 번민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작품은 달라도 메시지는 같다. 옥상은 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 넓게 그리고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전통 건축에서 지붕은 비나 눈을 쉽게 흘려보내기 위해 삼각형 꼴의 박공지붕이 기본이었다. 기와와 같은 재료의 특성과 급한 경사 때문에 과거에는 지붕 위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19세기 인류의 발명품인 콘크리트는 지붕을 평평한 바닥으로 만들며 옥상이라는 새로운 ‘인공 대지’를 선사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동안 이 귀한 공간을 물탱크나 기계실을 설치하는 별 쓸모없는 공간쯤으로 치부해 왔다. 1970~80년대 서울의 빌딩 옥상 대부분을 뒤덮었던 파란색 물탱크들은 우리가 옥상을 얼마나 기능적으로만 소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자, 그 시대가 여유보다 효율에 복무하고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호텔에 투숙하게 될 외국인의 시선을 염려해 옥상 정화 작업을 시작하고 계단 설치를 의무화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옥상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옥탑방의 시작이다. 옥탑방은 비록 신고되지 않는 불법적 측면이 있었으나, 삭막했던 옥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서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유럽의 도시들도 과거에는 대부분 경사지붕이 일반적이었고, 프랑스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붕 아래를 다락방으로 사용했다. 주로 가난한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머물던 춥고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바라본 파리의 지붕 풍경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위로와 영감을 주었다. 이후 근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는 옥상에 ‘공중 정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근대 건축의 핵심 원칙으로 제시했다. 건물을 지으며 사라진 지상의 녹지를 옥상에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현대 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미국에서는 마천루의 꼭대기가 자본주의적 쾌락과 결합하여 ‘펜트하우스’라는 새로운 거주 문화를 만들어냈다. 지상의 공원은 모두를 위한 공간이지만, 옥상의 정원은 오직 나만을 위한 사적인 낙원이 된다는 점이 부자들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자극했다.

건축물과 공원이 하나로 통합된 풍경을 보여주는 이화여대 캠퍼스센터.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누리집 갈무리

오늘날 지붕은 단순히 건물을 덮는 뚜껑이 아니다. 건축가들은 이를 ‘다섯번째 입면’이라 부르며 건물의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다룬다. 지붕까지 입면의 연장선에서 설계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으며, 나아가 녹지와 건물을 하나의 지형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일본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은 지붕 자체를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로로 만들어 지붕이 곧 지반이 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서울의 이화여대 캠퍼스센터(ECC)는 건물을 지하에 묻고 지붕을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언덕처럼 복원하여 건축물은 사라지고 공원만 남는 시각적 마법을 선사했다. 서울 마포구 옛 서울화력발전소를 현재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로 리모델링 중인데, 서울에서 가장 넓고 인상적인 옥상광장이 조성되면 시민들은 뉴욕 맨해튼에 못지않은 강변 야경을 즐길 수 있게 된다.

한강과 서울 여의도를 바라보는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공사 중)의 옥상 광장. 건축가 조민석 제공

똑같은 아파트와 규격화된 평면에 익숙해진 오늘날 한국인에게 옥상은 더욱 의미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지면에서 단 몇층만 올라가도 세상은 전혀 다른 표정으로 우리를 반기며, 우리가 발 딛고 선 대지의 개념을 넓혀 준다. 아직도 많은 아파트에서 안전과 관리를 이유로 개방을 주저하지만, 똑똑한 건축적 장치를 통해 단점보다 장점을 훨씬 크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지가가 상승하고 녹지가 부족한 현대 도시에서 옥상 녹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까워지고 있다. 일반 단열재보다 뛰어난 열효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텃밭을 가꾸고 노을을 감상하는 소소한 사치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방치하면 거칠고 무미건조한 콘크리트 바닥에 지나지 않지만,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삶의 질을 송두리째 바꾸는 또 하나의 안식처가 된다.

옥상의 의미는 여기서 한걸음 더 확장된다. 옥상은 건축의 문제를 넘어 도시가 시민에게 얼마나 많은 여유를 허락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시를 지탱해온 두가지 핵심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모두의 평등은 오랫동안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시민에게 옥상을 개방하고, 그곳을 머물고 가꾸는 공간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쩌면 삭막한 도시 속에 잊힌 또 하나의 가치, 우애를 회복하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실천일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자유도, 획일적인 평등도 아닌, 같은 하늘과 바람을 함께 누리는 공동의 경험 말이다.

도시는 우리가 머무는 방의 크기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보다 한층 더 높이 올라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도시도, 우리의 삶도 그 높이만큼 깊고 넓어진다. 오늘 하루 당신이 머물렀던 공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하늘이 있다. 그리고 복잡한 삶을 잠시 내려다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반이, 지금도 도시의 모든 옥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임우진 | 건축가. 이론보다 현장을, 현상보다 그 원인을, 그리고 건물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공간과 도시를 만들어왔다. 25년간 파리에서 활동 중이며, 여러 나라에 살면서 체화한 통문화적 시선으로 비판보다는 영감에, 우월함보다는 다양성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관심의 일부를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에 담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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