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가 좋아~” 지난 3일 개봉한 영화 ‘와일드 씽’의 가수 최성곤은 발라드 ‘니가 좋아’ 단 한곡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39주 연속 2위에 머문다. 이와 대조적으로 최성곤의 본체인 배우 오정세(49)는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한다. 영화 ‘극한직업’의 테드 창,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상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의 박경세까지, 오정세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다채롭다. 1997년 데뷔 이후 30년차를 맞은 지금까지 쉼 없이 연기해온 덕분이다.
다양한 작품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캐릭터를 연기해온 오정세는 최근 연기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 소속사 건물에서 만난 오정세는 이런 평가에도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작품이 잘되고, 또 캐스팅이 되고, 어떤 때는 이상한 결과가 나오고의 반복인 것 같아요. 이게 배우의 기본 설정값이죠. 잘됐다고 너무 좋아하고, 안됐다고 너무 좌절하면 금방 지칠 것 같아서요. 많이 안 흔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오정세는 1997년 영화 ‘아버지’로 데뷔한 이후 포털사이트 인물 정보에 기록된 출연작만 영화 79편, 드라마 40편이다. 작품이 잘돼도, 혹은 무관심 속에 조용히 막을 내려도 계속 시도하고 깨지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다작 배우’가 됐다. “(작품 선택 기준은) 다 달라요. 어떤 경우에는 작품이 좋아서 단역이라도 상관없고, ‘두잉’(doing)이 아니라 ‘빙’(being), 이 작품에 존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욕심이 생기기도 해요. 어떤 작품은 캐릭터가 너무 탐나서 고르기도 하죠. 어떤 작품은 감독님이랑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선택하고요.”

그동안 연기한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특히 오래도록 기억되는 캐릭터들이 있다. 첫 주연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의 톱스타 이승재, 짧은 분량에도 큰 존재감을 뿜어낸 ‘극한직업’의 테드 창, ‘동백꽃 필 무렵’의 안경사 노규태, 최근 종영한 드라마 ‘모자무싸’의 질투심 많은 감독 박경세 등에다 ‘와일드 씽’의 발라드 왕자 최성곤이 추가됐다. 공통점은 찌질한 구석이 있지만 정이 간다는 것. 이승재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진심을 전하는 대신 다른 남자와 잤느냐고 쏘아붙이고, 테드 창은 조직폭력배의 수장이지만 영어 이름 하나 제대로 만들 줄 모른다. 노규태는 술집 사장 동백이 앞에선 꺼드럭대지만 변호사 아내 앞에선 한없이 온순해진다.

캐릭터 설정은 대체로 ‘밉상’에 가깝지만 관객과 시청자들로부터 미움보다는 사랑을 받는다. 그 배경에는 오정세의 정확한 캐릭터 해석이 있다. “제가 쉬운 배우(쉽게 연기하는 배우)는 아닌 것 같아요. 작품을 할 때 ‘이게 맞아요?’ ‘이런 거 어때요?’ 하는 질문을 많이 해요. 한 인물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뭔가를 하려는 배우인 것 같아요.” 예컨대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를 연기할 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인물’로 이해하고 방에 외로움에 관한 서적이 있었으면 한다고 소품팀에 요청했다고 한다. 어설프고 부족한 노규태를 표현하기 위해 옷의 상표·가격표 태그를 떼지 않고 입기도 했다. ‘와일드 씽’의 최성곤을 연기할 때는 음악을 향한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차 안에 발성 연습용 빨대를 가득 놔뒀다고 한다.

오정세는 특히 코미디 작품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코미디 연기를 할 때 더욱 엄격한 편이라고 한다. “코미디 작품에 들어갈 때 더욱 예민하게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더라고요. 웃기려고 하는, 인위적인 코미디를 해야 하면 되게 힘들어해요. ‘웃기려고 하는데 안 웃기네?’ 이런 반응이 나오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와일드 씽’은 작정하고 웃기는 영화인 만큼 더욱 도전적이었다. “최성곤의 외모도 ‘이런 머리 스타일 괜찮나?’ ‘지금 너무 웃기려고 하나?’ 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온 건데요, 좋아해주셔서 안도했죠.”
연기 활동의 버팀목이 돼준 이들, ‘모자무싸’의 영화계 모임 8인회 같은 존재가 그에게도 있다. “20년 전 배우를 모집하는 기관에서 만난 친구들과 아직도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요. 누군 다른 직장을 가지고, 누군 결혼하고 했지만, 그 모임이 저한테는 뿌리 같고 든든해요. 예전엔 우리만의 영화제와 시상식도 열었어요. 뒤풀이 회비가 2만원인데, 수상자는 10만원을 내야 했죠.” 모임 멤버로는 감독 겸 배우 양익준, 배우 박병은 등이 있다.

어느덧 30년차 배우가 된 그는 언제 처음 배우의 꿈을 꾼 걸까. “고3 때까지는 물 흐르듯 살았어요. 근데 고3 때 가고 싶은 학과를 정하잖아요. 당시 어떤 학과를 가면 평생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학과들을 다 지워나가다 보니 제일 마지막에 남는 게 연기더라고요.”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추리다 보니 배우 하나가 남았다는 그. 40년차, 50년차가 돼도 가늘고 긴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것만 같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