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차경·비춤·울림…국립중앙박물관

한국적 미학을 담아낸 대표 건축

(서울=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의 건축은 한국의 전통적인 자연관과 건축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기본 개념을 설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전통 건축양식이 아니라 이면의 정신을 다루었고, 또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라 전통 건축을 재해석함으로써 현대적인 수사를 사용했다." 국립중앙박관을 설계한 박승홍 건축가의 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바라본 남산[사진/임헌정 기자]

◇ 한국적 미학을 담아낸 현대 한국 건축의 '얼굴'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에 가면 빼놓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박물관 건물 앞에 서서 멀리 남산을 바라보는 것이다. 박물관 건물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프레임 안으로 서울의 상징인 남산이 들어온다.

여기서 남산은 박물관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된다.

이처럼 바깥 경치를 빌려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건축 기법을 '차경'(借景)이라고 한다.

차경 기법은 한국 전통 건축의 정수로 꼽힌다.

건물을 계곡 옆에 배치해 자연의 소리와 풍경을 빌려온 담양 소쇄원, 좌우로 긴 누각인 만대루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면 기둥과 기둥 사이로 낙동강과 병산의 절경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안동 병산서원, 정자에 앉아 연못과 숲을 내다보면 건축과 자연이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되는 창덕궁 부용정 등이 차경의 대표 사례이다.

차경을 감상할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그 개념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국중박을 방문해볼 일이다.

차경이 그만큼 극적으로 펼쳐지는 예를 달리 찾기 어렵다.

으뜸홀에서 올려다본 천장[사진/임헌정 기자]

◇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는 '차경'

남산을 소나무 하나 건드리지 않고 통째로 핵심 건축 요소로 끌어들인 국중박의 건축 구조는 내외국인 관람객으로부터 탄성을 자아낸다.

박물관 건물 중심에 자리 잡은 널찍한 개방 공간인 '열린마당'은 한국 전통 가옥의 대청마루를 연상시킨다.

지붕은 있으되 벽이 없고, 벽 대신 큰 창이 뚫려 있는 느낌을 준다.

옛날 마루는 양쪽 벽면을 터놓을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었다.

손님이 오면 응접실이 되고, 가족이 담소를 나누거나 식사를 할 수도 있는 장소이다. 서재가 되기도 하고, 무더위에는 침실로 변신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역사, 문화, 예술의 전당인 전시관의 입구에 펼쳐진 이 열린마당은 언제든지 손님 맞을 준비가 돼 있고, 금방이라도 놀이와 축제가 펼쳐질 것처럼 틔여 있다.

실제로 열린마당에서는 작은 음악회 등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열리고, 박물관 방문객들은 자연스레 청중이 되는 일이 잦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심 공간인 '열린마당'과 멀리 보이는 남산[사진/임헌정 기자]

국중박의 앉음새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다)이다.

등 뒤로는 남산이 수호신처럼 박물관을 내려다보고 있고, 앞으로는 '거울못'이라는 큰 연못과 한강이 펼쳐진다.

한국에는 산이 많고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박물관을 방문하면 산과 물에 기대 살고, 이를 소중히 했던 한국인의 자연관을 느끼게 된다.

◇ 역사의 거울에 나를 비춘다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 내려 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면 고성의 성곽처럼 웅장한 전시관 건물이 눈앞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듯하다.

전시관에 닿으려면 거울못을 지나야 한다.

박물관 외양이 수면에 비치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큰 연못이다.

거울못[사진/임헌정 기자]

박물관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 탐방객은 이미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기 시작한 것 아닐까.

지난해 국중박 관람객은 650만7천483명에 이르렀다. 세계 박물관 중 루브르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에 이어 3번째로 큰 규모였다.

한류 열풍 등으로 인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 사이에서도 증가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박물관을 방문해보면 실제로 외국인 관람객이 부쩍 늘어났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방문객 중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6% 미만이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연간 외국인 관람객 추정치는 전체 관람객의 1.11∼5.23%였다.

역대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 지난해는 3.55%였다.

이는 국중박 탐방객 중 절대다수가 내국인임을 말해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E.H.카)라는 명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때 한국인들의 박물관 나들이는 고무적이다.

내국인 관람이 많은 한국의 박물관 현상은 해외 박물관 관계자들이 부러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국중박 외에도 지난해 관람객 기준 세계 100위권에 이름을 올린 국내 주요 국립박물관 및 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35위), 국립경주박물관(39위), 국립부여박물관(78위), 국립공주박물관(89위)이다.

야외전시장[사진/임헌정 기자]

거울못에는 2009년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청자정이 있다.

지붕에 올려진 기와는 전남 강진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 청자기와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거울못은 야외 정원과 숲속 오솔길로 이어진다.

정원의 야외 전시장에서는 숲을 거닐고,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유물을 감상할 수 있다.

남계원 칠층석탑, 흥법사 출토로 전하는 염거화상탑, 보신각종,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 등이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된 야외 전시 문화재들이다.

후원, 계류, 폭포 등으로 이루어진 정원은 인공적 요소를 최대한 자제하고 자연미를 살렸다.

금강송, 회화나무 등 대형 재래 수목들이 웅장한 건물과 조화를 이룬다.

개화 시기를 달리하는 150여 종의 지피식물이 철마다 다양한 꽃을 피운다.

◇ '역사의 길'이 들려주는 울림들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사진/임헌정 기자]

박물관 주 건물은 외부에서 보면 문화재를 지키는 든든한 '성곽' '성벽'의 인상을 준다.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 유리를 통해 들어온 부드러운 자연광이 아기 피부를 떠올리는 밝은색의 라임스톤 벽에 부딪히며 흩어져 따뜻한 느낌을 선사한다.

전시관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메인 로비 공간인 으뜸홀에서 경천사 십층석탑까지 '역사의 길'이 쭉 뻗어있다.

이 길은 박물관 내부의 중심축을 이루는 거대한 복도로, 전시실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이다.

현대인들을 과거와 연결해주는 가교와 같다.

경천사 탑[사진/임헌정 기자]

경천사 탑은 높이가 약 13.5m에 달하는 큰 규모이다. 일제 강점기에 무단 반출됐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돌려받았다.

기단과 탑신에 부처, 보살, 풀꽃 무늬 등이 뛰어난 기교로 새겨져 있다.

원래 야외에 있어야 할 문화재이지만, 보존을 위해 역사의 길 끝에 세워졌다.

길 중간쯤에 서 있는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는 실물 크기에 가까운 8m 높이의 거대한 LED 미디어 타워이다.

중국 지안에 서 있을 비석 진본의 크기를 실감하게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감상하는 관람객들[사진/임헌정 기자]

벽면에는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조선 지도의 결정판 '대동여지도'가 전시돼 있다.

22첩의 지도를 모두 연결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에 달하는 대형 한반도 지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정교하게 표시된 산줄기와 물줄기가 고산자의 장인 정신을 느끼게 한다.

'사유의 방'에 전시된 국보 반가사유상[사진/임헌정 기자]

역사의 길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사유의 방'에 이른다.

넓은 공간에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만 오롯이 전시돼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두 부처와 어둑하고 고요한 침잠의 공간이 관람객을 사유의 세계로 이끈다.

외규장각 의궤전시실[사진/임헌정 기자]

사유의 방 맞은편에 있는 외규장각 의궤 전시실도 관람객이 빼놓지 않고 감상하는 곳이다.

오직 임금만 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만든 어람용 의궤의 아름다운 비단 표지들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전시관 도입부부터 관람객은 격조 높은 의궤의 세계로 빠져든다.

국중박은 규모 면에서 세계 6위 박물관이다. 그 건축은 고요함 속에 강력한 울림을 품고, 침묵 속에서 온기를 전하며, 수수하나 품이 넉넉한 한민족의 성정과 닮은 듯하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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