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외모 지상주의’에 던지는 질문
의학이 성형 대신 심미안을 ‘치료’하면?
어느 쪽이든 ‘고친다’는 건 ‘결핍’ 전제돼

김준혁의 미래 의료인을 위한 책장
의료는 외모에 개입하여 바깥으로 드러난 부분을 고치는 방법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왔지요. 근대 초기 전상자의 기능 회복에 초점을 맞추던 성형 영역은, 이제 개인의 외모를 다른 식으로 바꾸어 내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성형 시술이 발달한 나라로 꼽히기도 하고요. 그만큼 외모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크기 때문일 거예요.
한편,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외모를 기준으로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이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의료적 도움은 외모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죠.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단편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서 과학소설가 테드 창은 문제를 뒤집어 놓습니다. 의학이 외모가 아니라, 외모를 판단하는 눈을 고칠 수 있다면?
단편소설은 ‘칼리아그노시아’(calliagnosia, 이하 칼리) 또는 실미증(失美症), 즉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구별하는 능력은 유지하되, 그 얼굴을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느끼는 심미적 반응만 차단하는 기술이 개발된 미래를 상정합니다.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빌려, 즉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작품은 대학 공동체 안에서 칼리아그노시아 적용을 의무화하려는 이들과 이런 지각 개입에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 충돌을 그려냅니다.
우리에겐 아직 이런 기술이 없지요. 하지만 혹시 생긴다면 자신에게, 또는 자녀에게 이 기술을 적용하고 싶으실까요? 외모에 대한 평가도, 자신의 반응도 없는 세상, 그리하여 외모로 기가 죽거나, 타인을 그저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곳. 한편으론 완벽하진 않더라도 작은 유토피아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외모로 인한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니!
하지만, 일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겠지요. 작품은 이 기술, ‘칼리’를 켜고 성장한 한 학생을 등장시키곤, 다른 이들이 ‘칼리’ 없이 성장하여 진학한 대학에 다니게 된 상황을 제시합니다. 문제는, 그녀가 새로운 방식으로 외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대학 진학 후 잠깐 칼리를 끄기로 한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거울을 보고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지요!

처음에는 그것이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아름다움이 호의와 기회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마저 도구처럼 사용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녀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타인의 외모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라왔다. 그런데 이제 외모가 사람들의 관계와 기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으며, 나 자신도 그 외모를 하나의 능력이나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칼리를 다시 켜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이 세계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까.
단순하게 정리했지만, 소설은 여러 가지 논점을 걸고넘어집니다. 예컨대, 칼리를 자녀에게 적용하는 것은 과보호가 아닌가? 인간의 외적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 또한 인간에게 부여된 특별한 능력일 수 있는데, 그 부작용 때문에 특별함(‘인간적인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을 지워버리는 것은 아닐까. 모두 살펴보아야 하는 이야기일 거예요. 특히 기술이 아이의 몸과 마음, 심지어 지각 환경까지 설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에, 아이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부모라면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선 의료와 외모에 대한 논의로만 한정하지요. 비록 작품이 과학소설의 틀로 묻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의료인문학의 핵심에 가닿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치료하는 것, 또는 ‘치료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쉽게는 ‘그래, 외모를 고치는 것보다 가능하다면 외모를 보는 눈을 고치는 게 옳지 않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외모에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외모는 대개 가장 먼저 읽히고, 설명보다 먼저 판단을 부르며, 판단의 대상이 되는 그의 몸에 달라붙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함정이에요. 무엇이 외모를 보는 ‘옳은’ 눈인지에 대해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의 ‘칼리’는 우리가 지금 지닌 외모에 대한 편향을 ‘치료’합니다. 외모를 판단하지 않는 중립적 시각은 타인에 대한 공평무사한 판단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다시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 시선인지는 누가 정할까요. 외모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현대 의료 앞에서, 외모는 취향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치료’ 대상으로 정하는지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여기에서 칼리는 성형수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형수술이 판단받는 사람의 얼굴을 바꾼다면, 칼리는 판단하는 사람의 눈을 바꾸니까요. 하지만 두 기술은 완전히 반대가 아닙니다. 둘 다 외모를 둘러싼 고통을 개인 안에서 처리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내 얼굴을 바꾸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내 지각을 바꾸면 차별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사이에서 정작 외모에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를 관계와 기회와 자신감으로 바꾸는 세계는 그대로 남는다는 점입니다.
작품은 성형수술과 칼리를 나란히 놓고 보게 합니다. 외모를 고치는 것과 그것을 보는 눈을 고치는 것은, 외모를 둘러싼 사회적 고통을 사회의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몸과 뇌에 대한 개입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같지요.
우리는 물어봐야 해요. 우리가 정말 다루려는 것이 무엇인지를요. 의학은 이제 이 질문을 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커졌고, 이제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만큼 발전했어요. 하지만, 아직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 부분을 물어보지는 않고 있네요.
우리는 아름다움을 통해 누군가를 고쳐야 하는 대상으로만 만들고 있어요. 소설 속 세상은 인식을, 우리는 외모 자체를 고치려 하지요. 하지만 둘 다 ‘고쳐야 할 대상’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이미 모자란다고 전제합니다. 그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닐까요.
김준혁 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