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별로 소방력 차이 있어…소방예산에서 중앙정부 비중 90%로 해야"
"소방관 순직률 선진 외국보다 높아…재난 대응체계 근본적 개혁 필요"
"말로만 바꾸겠다는 것 30여년간 반복됐다"…김상철 前 소방관 인터뷰
[※ 편집자 주= 김상철 전(前) 소방관의 인터뷰 기사는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첫 번째로 화재 현장의 위험성 등을 다뤘습니다. 다음 주 이후에 나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사에는 소방관의 처우, 인사, 구조적 문제 등이 들어갑니다. [삶]은 자서전적 인터뷰여서 개인의 스토리와 사진 등이 포함됩니다.]

[윤근영 기자 촬영]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2001년 3월 4일 서울 마포소방서 구조대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새벽에 출동 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우리는 홍제동 화재 현장으로 긴급 출동했습니다. 이곳은 마포소방서가 아닌 서부소방서(현재의 은평소방서) 관할이었는데, 무전에서 나온 내용으로는 우리의 구조 대상은 시민이 아닌 소방대원이었습니다.
나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손톱이 빠지는 것도 모른 채 잔해물을 제거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거실 쪽에서 내 고향 친구이자 서부소방서 구조대원인 장석찬이 발견됐습니다. 그는 누워 있었는데, 육안으로 봐서도 이미 숨져 있었습니다. 공기 마스크는 벗겨져 있었고, 얼굴은 찡그린 표정이었습니다. 그는 양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내가 펴려고 해도 펴지지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는 김상철 전(前) 소방관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인터뷰는 10월 22일과 29일 두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인터뷰 장소는 인천에 있는 김 전 소방관의 사무실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2001년 홍제동 화제 당시 소방대원은 내 친구를 포함해 6명이 순직했다"면서 "당시 숨진 대원들은 방화복이 아닌 방수복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김 전 소방관은 "현재 소방대원의 복장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이지만 예산 부족으로 초래되는 전반적인 위험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방관이 죽은 다음에 아무리 큰 훈장을 주고 보상금을 많이 제공해도 사망한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면서 "소방관이 안전해지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김 전 소방관은 "현재 소방 예산의 90%를 지자체가 담당하고 중앙정부는 10%만 부담하고 있다"면서 "소방 공무원은 국가직이므로 중앙정부 대 지방정부의 예산 비중을 90 대 10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소방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전문교육, 장비 교체 등을 제대로 해야 한다"면서 "중앙정부는 소방관을 영웅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기댈 것이 아니라, 소방에 대해 실질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1967년 경기도 일산에서 태어난 김 전 소방관은 특전사에서 5년간의 복무를 마친 뒤 1992년부터 32년간 서울과 경기지역 소방서에서 인명구조, 화재진압, 소방 행정 등 여러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공부에도 집중해서 한성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소방 현실의 문제를 알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대한민국 소방관 김상철입니다', '소방 행정학', '소방 지휘론', '소방 심리학' 등 소방 관련 책들을 출간하기도 했다.
2024년 서울 서초소방서에서 퇴직한 그는 현재 개인사업을 하면서 소방 문제를 알리기 위해 기고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다음은 인터뷰 1차 기사 질문-답변
-- 본인의 고향은 어디인가.
▲ 1967년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풍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내 고향의 현재 지명은 고양특례시 일산동구 풍동이다. 나는 일산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 아버지 고향이 일산인가.
▲ 아버지 고향은 서울 대방동이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열차에 태워져 북쪽으로 끌려가다가 도주하셨다고 한다. 강제 징용돼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열차에서 내려 숨은 곳이 일산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여기서 어머니를 만나셨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목수 일도 하셨다. 풍수지리에도 밝으셔서 묫자리를 찾는 일로 돈을 좀 버셨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매우 성실하셨고, 깔끔하신 분이었다. 시골집이었지만 정리 정돈이 잘돼 있었고, 집 주변에는 꽃도 잘 가꿔져 있었다. 어머니는 인심이 후하신 분이었다.
-- 아버지의 농사는 주로 무엇이었나.
▲ 지금은 일산 지역 농민들이 꽃을 많이 재배하는데, 당시는 주로 벼농사였다. 나의 아버지도 벼농사를 하셨다. 군 복무 시절 나는 가을에 휴가를 나와 탈곡을 돕곤 했다. 나는 체력이 좋아서 지게질도 잘했다.

[본인 제공]
-- 본인은 특전사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어떻게 입대하게 됐나.
▲ 나는 고교 졸업 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느 날 친구들이 군대에 간다면서 우르르 서울의 병무청에 몰려갔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특전사 부사관에 지원했다. 필기와 체력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했는데, 부모님께 이를 알린 것은 훈련소 입소 이틀 전이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울고, 형도 말렸다. 그렇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간 나는 이곳에서 1개월, 특전사령부에서 6개월의 기본 훈련을 마치고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됐다. 내가 제대한 것은 의무 복무기간 5년이 지난 1991년이었다.
-- 군 복무를 마치고 바로 소방관 시험을 봤나.
▲ 제대 후 어떤 사업을 하다 문제가 생겨서 그만뒀다. 이때 나보다 먼저 소방관이 된 고향 친구가 있었다. 그도 특전사 출신이었는데, 나한테 소방관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소방서도 군대와 비슷할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가 강하게 권하는 바람에 공채 시험을 보게 됐다. 나는 아주 집중력 있게 열심히 시험공부를 했고 그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서울 종로소방서 구조대에서 소방대원 일을 시작했다.

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 중리리에서 소방대원이 산불이 옮겨붙은 공장 건물에서 화재 진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32년간 소방관으로 일했는데, 불길 안에 들어갈 때 두렵지 않았나.
▲ 당연히 무섭다. 훈련이 잘돼 있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소방대원이 아니면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조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불길 안으로 들어간다. 그게 소방관의 의무이고 존재 이유다. 그런데 나는 일단 불길 속으로 들어가면 두려움이 사라졌다. 현장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 화재 현장은 어떤 점이 위험한가.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방향감각을 잃고 출구를 못 찾을 수도 있다. 열과 연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고, 바닥이 붕괴하거나 어떤 구조물이 위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짊어진 공기통의 공기가 소진될 수도 있다. 불길 안으로 같이 투입됐던 동료와 분리되거나, 외부와의 무전이 두절되기도 한다.
-- 화재 현장의 온도는 어느 정도인가.
▲ 불은 성장기, 최성기, 쇠퇴기 등의 경로를 밟는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최성기에는 주변 공기 온도가 1천도에 이를 수 있다. 방화복을 입어도 체온이 38∼39도 이상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땀이 많이 쏟아지는데 일정 시점 후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다.

백드래프는 실내로 공기가 유입되면서 불길이 갑자기 치솟는 것으로 현장에 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한다. [충북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소방관이 뿌리는 물도 위험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
▲ 그 물이 화점(불꽃)에 도달하기 전에 수증기로 바뀌기도 한다. 그 뜨거운 수증기가 방화복을 뚫고 들어가 소방관에게 화상을 입히는 일이 있다.
-- 플래시오버, 백드래프트란 무엇인가.
▲ 실내의 가연성 물질이 가열되다가 특정 시점에서 일제히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것을 '플래시오버(Flashover)'라고 한다. '백드래프트(Backdraft)'는 실내의 가스가 외부의 공기와 만나 갑자기 불길이 거세게 오르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소방관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 소방관들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나.
▲ 백드래프트의 위험 때문에 소방관들은 문을 한 번에 확 열지 않는다. 먼저 문손잡이 등을 만져보면서 안의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추정한다. 그리고 문을 조금씩 열었다 닫기를 반복한 뒤에 진입한다. 반대편에 있는 창문을 깨트려서 실내의 가스를 빼내기도 한다

2024년 4월 부평소방서 신속동료구조팀(RIT)이 고립된 동료 소방관 구조 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본인이 구조활동을 하면서 매우 위험한 적이 있었다면.
▲ 1990년대 후반 서울 청량리 경동시장의 지하 한약재 창고에서 불이 났다. 화점(불꽃)을 찾기 위해 들어갔는데, 창고는 생각보다 매우 넓었다. 칠흑같이 캄캄해서 랜턴도 소용없었다. 당시 짊어진 공기통은 20분짜리로 현재 40분짜리의 절반에 불과했다. 신속하게 다시 나가야 했는데 출구가 어디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같이 들어온 동료도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 내가 갖고 들어온 수관(소방호스)을 따라 낮은 포복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러 개의 수관이 얽혀서 방향을 잡기 어려웠다. 다른 소방관들이 갖고 들어왔다기 놓고 나간 수관들이 꼬이는 일은 화재 현장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게다가 그날 내가 짊어진 공기통의 공기도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나는 호흡이 답답하니 공기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그다음에 내가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지하에 쓰러져 있는 나를 다른 대원이 발견해서 끌고 나온 것이다. 나는 그때 숨질 뻔했다
-- 서울 합정동에서도 위험한 일을 겪었다고 했는데.
▲ 역시 1990년대 후반이었다. 합정동 오거리 단독주택에서 불이 났다. 그 집의 어머니는 맨발로 뛰어나와서 안에 아들이 있다고 외쳤다. 화염이 창문 밖으로 휙휙 나오고 있었으니 실내 공기 온도가 1천도에 이르는 최성기였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방수복에 물을 끼얹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수관을 잡은 채 앞장섰고, 후배 대원들이 따라왔다.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면서 들어갔는데 그 물이 공중에서 말라 버릴 정도로 화염은 강렬했다.
-- 그 아들은 금방 찾았나.
▲ 그 청년이 있다는 2층에 올라가서 화장실, 욕실, 옷장 등을 살폈다. 불이 나면 사람이 본능적으로 숨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연기 속에서 다락방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곳을 살펴보니 그 청년이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불이 나면 천장 쪽이 더 위험한데 그 청년은 그걸 모르고 다락방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는 발달장애가 있었다.
-- 그다음 어떻게 했나.
▲ 수도꼭지를 확 틀어서 수건에 물을 막 붓고는 그걸 그 청년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그대로 둘러업었다. 그 청년은 20대여서 체중이 꽤 나갔지만, 나는 무거운 줄도 몰랐다.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은 이렇게 초능력을 갖는다. 내가 다이빙하듯이 밖으로 뛰어나오자마자 그 집은 우두둑하면서 무너졌다. 부분적으로 붕괴된 것이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나는 그 집 아들과 함께 숨졌거나 아주 크게 다쳤을 것이다.

[연합뉴스 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지금까지 소방대원이 가장 많이 순직한 것은 2001년 3월 4일 홍제동 화재 사건이라고 하는데.
▲ 그날 나는 마포소방서 119 구조대 근무조였다. 새벽 4시쯤에 출동 벨이 울렸다. 홍제동 현장 부근에 긴급히 도착했지만 더 이상 구조대 차량이 움직일 수 없었다. 이면 도로에 많은 차량이 양열로 불법 주차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뛰기 시작했다. 25㎏이 넘는 개인장비를 짊어진 채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렸다. 화재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미 2층 다가구주택이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곳에 소방대원들이 매몰돼 있었다.
-- 붕괴 현장에 바로 들어갔나.
▲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구조작업을 했다. 거의 마지막으로 거실과 부엌 쪽의 잔해물을 들어냈는데. 건물더미의 작은 공간에 내 친구 장석찬이 누워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인공호흡을 했지만,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공기 호흡기는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 공기 호흡기는 왜 벗었을까.
▲ 공기통에 있던 공기가 소진돼 호흡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호흡기를 '면체'라고 부르는데, 그걸 벗으면 죽는 줄 알지만 당장 호흡이 안 돼 고통스러우니 벗게 된다. 그날 홍제동 현장에서 내 친구를 포함해 6명의 소방대원이 순직했다.

2001년 3월 6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열린 홍제동화재순직 소방관 합동영결식에서 유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재판매 및 DB금지]
-- 그날 참사의 경위는.
▲ 그 집의 아들이 정신장애가 있었는데, 어머니와 싸우다 홧김에 불을 질렀다. 먼저 무사히 빠져나온 어머니가 "아들이 집 안에 있다"고 소리쳤고, 서부소방서 구조대원 등이 그 아들을 구조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주택이 금방 붕괴하고 말았다. 지은 지 30년이 넘은 데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없이 벽돌을 쌓아 올린 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주택은 뜨거운 불과 소방호스 물에 쉽게 무너진다. 그런데 당시 그 아들은 집안에 없었다. 이미 빠져나와 도주한 상태였다는 것은 나중에 확인됐다.
-- 고(故) 장석찬 소방관은 본인과 친한 관계였나.
▲ 그는 같은 고향, 같은 고교 친구였다. 그도 특전사 출신이었는데 제대 후 개인사업을 하다 잘 안됐다. 그때 내가 강하게 권유해서 늦은 나이에 소방대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소방대원이 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아내와 유치원생 아들을 두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내가 소방대원을 하라고 강권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동안 술도 많이 마셨다.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눈물이 난다.

[본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당시 순직한 소방대원들의 보호 장비가 턱없이 열악했다고 했는데.
▲ 원래는 국제기준에 맞는 120만원 상당의 방화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8만원짜리 방수복을 입고 있었다. 특수장갑, 특수화, 특수장갑, 특수헬멧을 착용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전국 거의 모든 소방대원이 그러했다. 대체로 신발은 고무장화여서 못 등에 의해 쉽게 뚫렸다. 헬멧은 오토바이용 수준이었다. 장갑은 면으로 만든 흰색 목장갑이었다. 간혹 좀 더 좋은 것을 착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개인이 사비를 들여 구입한 것이다.
-- 왜 이런 복장이었나.
▲ 나라에 돈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제도가 문제였다. 당시는 소방관들이 지방직 공무원이었다. 이러다 보니 소방 분야는 지자체의 예산투입 대상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홍제동 화재 사건이 계기가 돼서 이런 복장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 일시에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지자체별로 재정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지자체별로 소방력의 차이가 있다. 이는 소방대원의 안전에 영향을 주고, 결국 시민에게 제공하는 안전 서비스의 불평등을 가져온다. 즉 화재진압, 구조, 구급, 특수 재난 대응 등에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2026년 10월19일 경기도 부천시 부천체육관에서 열린 '故 김진석 소방위 영결식'에서 소방대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공동취재 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올해도 완도와 부천에서 소방대원 3명이 순직했는데,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소방대원 순직 비율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화재 현장에 무리하게 진입해서는 안 된다. 소방 지휘 역량을 강화하고 대원들의 전문성을 더욱 높여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현장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 진압하는 인력뿐 아니라 소방대원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조하는 '동료 구조 전담팀'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보호복과 안전 장비, 노후화된 차량과 특수장비의 교체 등도 제때 이뤄져야 한다. 보다 근원적인 방안 중 하나는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다.
-- 결국 예산이 문제일 듯한데
▲ 소방대원이 국가직 공무원으로 전환된 것은 2020년이다. 그 후 6년이 지났지만, 소방 예산에서 중앙정부가 부담하는 액수는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지자체가 담당한다. 반대로 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90%, 지방정부가 10% 정도 부담토록 해야 한다. 물론 일시에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순차적으로라도 해야 한다.
-- 정부와 국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정치인들과 정부, 지자체 등은 소방대원이 순직할 때마다 뭔가 해줄 것처럼 말한다. 그러다 여론이 잠잠해지면 이행하지 않는다. 나는 소방관으로 근무한 지난 1992년부터 지금까지 34년간 이런 행태를 수도 없이 봐왔다. 이제는 정말로 실천하길 바란다. 실질적으로 법령을 개선하고, 예산체계를 바꾸기를 바란다. 그리고 재난 대응 체계의 전반에 대한 근본적 개혁에 나서야 한다.
keunyo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