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단체, 호소문 내고 실태조사…"협의체 만들어 보상 체계 촉구"
권리 행사 어려운 구조적 문제…"학습데이터 출처·이용내역 확인 제도화 시급"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인턴기자 = 지난 3월 30일 광화문 교보문고의 모습. [촬영 강민지]
(서울=연합뉴스) 김정은 기자 = 국내외에서 인공지능(AI) 학습용으로 의심되는 도서 대량 구매 움직임이 잇따라 포착되면서 국내 출판계의 우려가 커졌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 등 출판 단체들은 잇따라 목소리를 내며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저작권자가 자신의 책이 AI 학습에 사용됐는지 확인하는 것 자체에 어려움이 있는 등 관련 제도 미비로 당장은 실질적 대응에 한계가 있는 실정이다.
◇ 국내외서 도서 대량 구매 움직임에 '비상'
AI 학습용으로 의심되는 도서 대량 구매 움직임은 당초 해외 사례에서 나타났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잇따라 포착됐다.
교보문고에는 올해 초부터 미국, 영국 등 해외 10개 업체에서 개별 도서를 한권씩, 업체별로 각 10만종가량 구매하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교보문고는 AI 학습에 활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해 납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보통은 국내 도서관 위주로 납품을 하고 용도가 확실하다"며 "그런데 이들 사례는 불분명한 해외 업체에서 불분명한 사유로 납품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예스24에도 지난 8월 말 미국 유통업체에서 중고책을 대량으로 사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와 관련해 미팅을 한 차례 했지만, 이후 이 업체와 연락이 되지 않아 추가로 진행된 사항은 없었다.
예스24 측은 "관련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으며, 유사 문의가 있을 경우 목적 등을 면밀하게 파악 후 대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문학번역원은 최근 미국 AI 기업 앤트로픽 소송과 관련한 저작권 합의 사이트에 올라온 보상 대상 도서 목록에 한국 작가의 책 21종이 등재된 것을 파악해 해당 작가들에게 통보했다.
앞서 앤트로픽은 AI 모델 훈련에 저작물을 불법 다운로드해 사용했다는 의혹으로 미국에서 집단 소송에 휘말린 바 있다.
일본에서도 최근 헌책방에서 철학, 역사, 의학 등 전문 분야 책이 대량으로 팔리는 현상이 목격되면서 AI 모델 개발사가 학습용으로 스캔하기 위해 사들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앤트로픽 로고 일러스트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출판단체들, 호소문·실태조사…"협의체 만들어 대응"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이와 관련해 각 서점과 유통사, 헌책방, 출판사 등을 대상으로 한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에서는 AI 학습용으로 의심되는 대량 구매 주문이 있었는지 등을 물을 계획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관계자는 "실태 조사 후에는 출판단체들의 협의체를 만들어서 대응책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최종적으로는 AI 학습 관련 보상 체계를 마련하고 입법화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최근 출판물을 AI 학습에 이용할 경우 정당한 보상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지난 15일 시작된 연명에는 20일 오전까지 푸른숲, 후마니타스 등 출판사와 관련 기관 등 단체 200여곳, 작가·번역가·그림 작가·출판 관계자 등 개인 570여명이 참여했다.
푸른숲의 조한나 대표는 "AI 기술은 엄청나게 빨리 발전하고 콘텐츠나 책들이 AI 학습에 활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은 없다"며 "출판계가 저작권료나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 대상은 거대 해외 기업들인데 개개인의 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는 문제"라고 짚었다.
후마니타스 관계자도 "AI에 검색을 해보면 책 소개부터 장별 요약까지 굉장히 자세하게 나오는데, 그런 정보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면서 비용은 지불하지 않고 있다"며 "정작 출판사들은 AI 업체들이 책 내용을 어디에서 가져와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출판인회의 관계자는 "호소문에 참여하는 분들이 계속 늘고 있다"며 "향후 국회나 정부와도 협력해 대응 방안을 찾아보려 한다"고 말했다.

중고책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권리 있지만 행사 어려운 구조…"법·제도 정비해야"
그러나 출판계에서는 현재로서는 법적인 장치가 미비해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출판물의 저작권이 제대로 보호받고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촘촘한 제도 마련과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박정인 덕성여대 AI 다이나인포(DynaInfo) 연구소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저자와 출판사가 자신의 책이 AI 학습에 사용됐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어떤 책을 어디에서 확보해 어떤 방식으로 이용했는지에 관한 정보가 기업에 집중돼 있으면, 권리자는 이용조건을 협의하기도 어렵고 침해가 의심돼도 이를 입증하기 어렵다"며 "'권리는 있지만 실제로 행사하기는 어려운 구조'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가장 시급한 조치는 학습데이터 출처와 이용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절차를 제도화하는 것"이라며 "AI 기업이 자료의 수집경로와 이용 근거를 기록·보존하고, 권리자가 자신의 도서가 포함됐는지 확인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해외 AI 기업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강제력을 확보하려면 "국내 시장에 AI 모델·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에게 학습 정보 확인에 필요한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정진근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AI 플랫폼들이 학습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것이 언론사와 서적 데이터베이스인데, 재료를 제공한 측이 정당한 대가를 어떻게 받아야하는지가 쟁점"이라며 "글로벌 스탠더드가 중요한 문제이고, 미국의 판례 동향을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1∼2년 안에 미국의 판례가 정립될 텐데 정당한 보상을 하게 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으로 본다"며 "이 경우 보상금의 징수, 배분, 산정에 대한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고 관련 법 제도가 정비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행정 지도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kj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