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두달여 전에 타계한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에 대한 여러 추모 글이 다양한 매체에 실렸다. 최근에 미국 시인 애덤 커시가 쓴 에세이 ‘이성적 담론의 시대는 끝났다’를 주의 깊게 읽으면서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이성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의 역사에서 오래된 질문이고, 수학자에게도 당연히 관심사이다. 이성의 여러 의미 가운데 수학자가 이해하기 가장 쉬운 것은 방법론과 관련된 ‘도구적 이성’이다. 17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격언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오직 정념의 노예여야만 한다’가 이 관점을 표현한다. 그는 ‘이성적 방법’이 목표를 달성하게끔 해 줄 수는 있어도, 이성이 목표 자체를 정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즉, 흄은 가치, 도덕, 욕구 등은 이성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성을 일종의 도덕적인 길잡이, 혹은 역사의 진화를 관할하기까지 하는 형이상학적인 원동력으로 간주하려는 노력도 근대 유럽 사상에 자주 나타난다. 에마뉘엘 칸트는 이성에 도덕적 역할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이론을 내놨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누구나 다 따르더라도 좋은 보편적인 가치인가’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하버마스는 이성을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 참여자들 사이에서 상호 정당화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즉, 그에게는 ‘이성적’이란 수식어는 ‘이성적 사고’나 ‘이성적 방법’보다 ‘이성적 담론’에 가장 적절하게 적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민주주의의 기반으로 여겼다. 공론장에서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를 설득할 수 있는 이성이야말로 민주 사회 질서에 절대적이라는 주장이다. 애덤 커시는 이런 철학자의 죽음이 건전한 민주 토론 문화의 종말을 의미한다며 한탄한 셈이다. 하버마스를 잘 알았던 미국 철학자 마틴 제이에 따르면,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이성적인 대화에 대한 믿음이 투철했고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1996년 서울을 방문했던 하버마스는 남북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건 당신들이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답하는 겸손을 보였다고 한다. 젊은 세대 정치·사회학자들에 비하면 이론을 객관적 검증에 기반해 형성해 가는 방법론을 배우지 않았으면서도 나름 많은 생각과 관찰을 근거로 의견을 내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 관점에서 ‘이성적 담론은 죽었다’고 한 애덤 커시식의 직관적 불평은 아쉬운 면이 많다. 인터넷 기반 의사소통에 대한 회의론을 지식인이 한없이 되풀이하는 양상도 이제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하버마스 자신은 2006년 강연에서 그에 대해 조심스러운 의견을 표명했다. ‘인터넷은 확실히 글을 쓰고 읽는 평등주의적 대중의 저변을 다시 활성화했다. … 반면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전세계적으로 수백만개의 파편화한 채팅 공간이 등장함으로써 대중이 오히려 수많은 고립된 쟁점별 공중(issue publics)으로 분열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디지털 기술이 학문적 발전이나 인간 복지에 사용되는 사례는 날로 증가한다. 예컨대 동식물 분포를 파악하는 과학자들은 인터넷을 이용한 일반인의 정보 제공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재난구조 활동에서 소셜미디어가 하는 역할도 잘 알려져 있다. 팬데믹 이후로 학자들은 공동 연구에 화상 통화 기술의 도움을 받는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성적 담론을 확장한 사례는 ‘민주적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가 아닌가 한다. 인터넷 사용자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는 오래전에 브리태니커 같은 전통적 백과사전의 역량을 넘어섰다. 주어진 서술의 진화 과정을 관찰하면 수많은 사람의 작은 기여가 합쳐져 점점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 즉, 이성이 혼란으로부터 서서히 나타나는 양상이다.
지금은 위키피디아도 인공지능 검색으로 대체되고 있는 시기이다. 대체 기술의 좋고 나쁜 면은 당연히 끝없는 토론의 대상이다. 앞으로 이성적 담론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인간 문화의 복잡계 내에서 점진적으로 출현하는 이성적 시스템을 포괄적으로 관찰하는 이성을 여러 종말론자에게 권장하고 싶다.